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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꿉 #3


비가 올 거래요.     


수잔이 술집 밖에서 그렇게 말을 붙였을 때, 세준은 수잔이 예상한 대로 행동했다. 비가 올지 안 올지 웅얼거리며 상대방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수잔은 학생 언론사에 처음 발 들였을 때 선배들이 가르쳐준 인터뷰 원칙을 떠올렸다. 취재원을 겁주지 말 것.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지지 말고, 가벼운 화제로 말문을 열 것. 다시 말해, 친구인 척을 할 것. 모든 사람은 타인을 덥석 믿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기자를 경계하다가도 금세 무거운 물건 내려놓듯 마음을 놓았고, 조금 더 지나면 자기 인생을 통째로 풀어놓을 때도 있었다. 교수의 연구실에 간 날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대학 내 퀴어 동아리에 관해 견해를 물었더니, 교수는 자신이 얼마나 진보적인 어른인가를 삼십 분 동안 침 튀기며 이야기했다. 수잔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눈동자에 동경을 가득 담아 바라보다 보면, 교수가 극단적인 말 한마디를 잔돈처럼 흘려줄지 모르니까.


문제는 한쪽 구석의 대학원생이 자꾸 이쪽을 힐끔거리는 거였다. 시선이 한두 번 얽혔을 때는 그저 착각인가 싶었으나, 교수의 시야 밖에서 계속 눈짓을 하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수잔은 시선을 교수에 고정한 채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저 대학원생 눈에는 이 인터뷰가 어때 보일까? 교수는 도덕책이라도 편 듯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는데, 저 구석에서 잡일하는 대학원생도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세준은 며칠 뒤 술자리에서도 침울해 보였다. 수잔은 그날 저녁에 그와 자주 눈이 마주쳤다. 자꾸만 힐끔대는 걸 보니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수잔의 머릿속에는 갑질, 교수, 맨얼굴 등 자극적인 단어들이 벌써 기포처럼 피어 올랐다. 세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잔은 따라 나갔고, 술집 거리의 검붉은 조명 속에서 먼저 말을 붙였다. 그런데 세준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무슨 간첩이 접선하듯 조심스레 수잔의 연락처를 물었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자 실실 웃으며 얼굴을 붉히는 거였다.


그가 뭘 제보하려는 게 아님을 알기까지 대략 일주일이 걸렸다. 어느 날 밥을 먹자길래 먹고, 내친김에 커피도 마시고, 무언가 아쉬워 맥주까지 마시고 나오는데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누가 봐도 취재가 아니라 데이트니까. 기분이 좋으면 금방 취한다는 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수잔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세준의 손을 잡아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세준의 의도를 처음부터 알던 것 같기도 했다. 세준은 문과 남자들과 달리 말수가 적었고, 그 덕분에 수잔은 그와 함께할 때 평소보다 곱절은 수다스러워졌다. 대화 소재는 대개 시답잖을 정도로 사소했다. 요즘 개봉한 영화, 가족에 대한 불평, 졸업하면 하려는 일……. 수잔은 녹음기를 켜지 않고 하는 대화가 무척 안락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식사하고 공원을 산책하고 커피를 마시다 보면 웃고 떠드느라 뺨이 아파올 때도 많았다.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을 너무 중요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녀는 진보 성향의 인터넷매체 기자가 되었는데, 기자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 없던 것 같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 할수록 세준과 함께하는 시간은 점점 더 소중해졌다. 학교를 벗어난 순간 온 세상이 무례하고 천박해졌으나, 세준과 있을 때만큼은 사소한 취향과 목표에 대해 얼마든 떠들 수 있었다. 각자의 일로 바빴음에도 그들은 어두운 술집에서 마감 때까지 한가로이 대화하곤 했다. 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두 마디씩 맞장구를 치면 수잔은 숨을 참았다 뱉는 것처럼 혼자 말을 쏟아냈다. 수잔은 세준이 말이 없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그 과묵함이 때로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수잔은 주택에 가기로 한 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거기서 무슨 광경을 보더라도 화내지 않겠다고. 세준도 이모네 주택에 가는 게 내키지 않을 텐데, 성질대로 짜증만 퍼부은 게 어쩐지 부끄럽다고까지 생각했다.


최대한 즐거운 휴가를 보내야지. 며칠 전의 다툼은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수잔은 그렇게 다짐했고, 그날따라 세준의 감정을 세심히 살폈다. 주택 내부는 어딘지 정리가 덜 된 것처럼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세준은 2층이 이모의 특히 사적인 공간이라고, 우리는 1층에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주의 주듯 말했다. 수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박물관에 온 듯 아무 물건에도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단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저녁거리를 사 오기로 했다. 거대한 지우개처럼 새하얀 신축 건축물, 그리고 붉은 벽돌로 담장을 쌓은 오래된 주택 들이 뒤섞여 서 있었다. 개중에는 마당에 수호신처럼 웅장한 나무를 심어놓아, 그 굵직한 가지가 길에까지 손아귀를 뻗치고 있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하나같이 털이 긴 대형견이었다. 세준은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한번은 대형 외제차가 골목으로 진입하다 멈춰 섰는데, 세준은 자신들이 큰 민폐라도 끼친 듯 황급히 자리를 비키기도 했다.


피자와 와인을 사 들고 돌아오는 길에는 세준의 안색이 더욱 안 좋아져 있었다. 빠삐가 이곳저곳 냄새를 맡느라 걸음을 멈추면, 그는 목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수잔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고, 더는 말을 걸지도 않았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는 거지? 세준은 수잔뿐 아니라 거리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빠삐 눈치마저 보는 듯 기가 죽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유약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세준이 핸드폰 진동을 무시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수잔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적어도 부자들 틈에서 산책한다는 이유로 어깨 움츠리는 건 아니라는 뜻이니까. 그래도 의문이 들기는 했다. 세준은 굳은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는데, 도대체 누구 전화길래 저렇게 긴장하는 것인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주택에 도착하자 세준은 전화 좀 하겠다며 수잔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그 순간 세준은 수잔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궤적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수잔이 빠삐를 데리고 주택에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산책하는 동안 세준이 빠삐의 목줄을 쥐고 있었으니 피자와 와인은 수잔이 들게 되었는데, 음식 냄새에 홀린 빠삐가 수잔을 향해 컹컹 짖는 거였다. 수잔은 전화에 방해될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빠삐의 목줄을 받아 쥐고 주택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등 뒤로 닫히자마자 바깥의 소리가 뚝 끊어졌다. 벌써 깜깜한 밤이 되어 있었다. 전등은 하나도 켜 있지 않았고, 통유리 창으로 드는 정원의 불빛에 천장 샹들리에만 대답하듯 빛나고 있었다. 수잔은 그 반짝임을 잠시 홀린 듯 바라보았다. 신발을 벗은 뒤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부엌 전등을 켜니 기분도 다시 밝아지는 것 같았다. 수잔은 찬장에서 예쁜 그릇을 골라 테이블에 꺼내놓은 뒤, 1층을 돌아다니며 하나씩 전등을 밝혔다. 실내가 밝아지자 유리창으로 보이던 바깥세상은 까맣게 지워졌다. 그 자리에는 수잔 자신의 모습이 거울 앞인 양 비쳤다.


세준은 곧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전화인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연인이 내가 모르는 이유로 행복하다면 호기심이 동하겠지만, 내가 모르는 이유로 불행하다면 그저 모른 척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하지만 빠삐가 낑낑대는 소리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유리창을 거울처럼 보던 수잔이 그 소리를 알아챘을 때는 빠삐의 불안 증세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주위에 없으면 불안에 떤다던 세준의 말이 그제야 떠올랐지만, 수잔은 태엽을 감은 듯 똑같은 자리를 서성이는 빠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오히려 빠삐는 수잔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유령이라도 본 듯 2층으로 달음질쳤다. 무언가를 벅벅 긁어대는 소리가 곧 주택 전체가 울려 퍼졌다. 무엇을 긁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와중에 들려오는 그 소리. 수잔은 유리창 속 자신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았다. 이모가 아끼는 귀중품이 박살 나는 건 아닐까? 빠삐의 목줄을 잡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선연히 떠올랐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물론 먼저 들었다. 빠삐에게 가까이 가봤자 상황이 악화될 공산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다는 욕구가 수잔을 사로잡았다. 세준이 얼른 들어오기를 기다렸지만―도대체 누구랑 통화한 건지 단단히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결국 홀린 듯 계단에 발을 디뎠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하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드는 그 순간, 수잔은 혼란한 머리를 비워내고자 걸음을 빨리하여 2층에 다다랐다. 어두웠다. 그저 어둡다는 것이 2층의 첫인상이었다. 창문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가로등 빛조차 새어들지 않았다.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즉시 물건 긁는 소리가 멈추고 어둠 속에서 으르렁 소리가 들려왔다. 주머니에서 간식을 꺼내 들이밀어도 소용없었다. 수잔은 우뚝 선 채 앞만 바라보았다.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 채로. 그녀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고, 2층의 모든 것이 썰물 빠지듯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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