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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꿉 #2

수잔이 연구실에 처음 들어온 날에도 그는 몇 번 곁눈질을 할 뿐이었다. 수잔은 마치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색깔이 있답니다, 라고 말하는 듯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교수를 인터뷰하러 온 학생이라기엔 영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어쩌면 세준의 지도교수가 그런 옷차림을 좋아할 사람임을 아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교수치고 퍽 젊은 여성인 데다 연두색 코트를 즐겨 입는 사람이었다. 기독교 대학에서 봉급을 받으면서도 툭하면 자기 SNS에서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적 행태를 비꼬았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고, 수잔처럼 학생 언론사에 몸담은 학부생들은 학교에 논쟁이 일 때마다 교수를 인터뷰하러 왔다. 권위라면 무턱대고 싫어하는 학생들, 교묘한 방법으로 권위를 쟁취하는 젊은 교수. 기묘한 공생인 줄은 알았지만, 세준은 그런 문제에 별 의견이 없었다. 그저 정리하던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성가실 따름이었다. 수잔에게 자꾸 눈길이 돌아갔으니까.


그날부터 세준은 수잔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지도교수는 사교적인 교수들 중에서도 유난히 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마음에 드는 학생을 모아 한 달에 한 번 맥주 모임을 주선할 정도였다. 똑똑한 신입생부터 피곤에 찌든 대학원생, 정장 차림의 졸업생까지―구성원은 다양했지만 머릿수는 열 명 남짓이었다. 수잔이 술자리에 왔을 때 다들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은 직장인은 능글능글 웃으며 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세준은 수잔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게 그녀의 옷차림 때문이 아님을 그때 알았다. 귀에 연달아 박힌 피어싱 때문도 아니었고, 한 번도 빗질하지 않은 듯 푸석푸석하고 긴 머리칼 때문도 아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세준은 사람들의 의아한 눈길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밖으로 나갔다.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지, 실제의 자신과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을 비교하면서.


“엄청 넓다. 여기 혼자 산다고?”


주택에 들어오고 수잔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수잔은 새것처럼 희게 빛나는 캐리어를 끌고 왔는데, 그걸 보니 자꾸만 어색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하철과 버스를 탔겠지. 거기서 마주친 사람들은 수잔이 공항에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수잔이 제주도 여행을 얼마나 기대했을지 보이는 듯해 자꾸 고개가 숙여졌다. 주택에서 휴가를 즐겁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저녁에 주택 앞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세준은 대낮부터 도착해 이것저것 청소하느라 바빴다. 수잔이 보면 안 되는 물건이 널려 있었다. 논문, 너무 어려운 책, 상장, 그리고……. 세준은 1층 책꽂이의 물건들을, 챙겨 온 종이 박스에 쓸어 담았다. 부엌 찬장에 있던 찻잔이나 위스키병 따위를 꺼내 빈자리를 채웠다. 그러고는 박스를 2층으로 가지고 올라가 테이프로 포장해두었다. 의외로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청소하는 동안 짖어대는 빠삐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왜 미안하지 않은 걸까. 거짓말을 하는데. 세준은 삶의 경험으로 중요한 걸 배운다는 말에는 코웃음쳤지만, 수잔과 연애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뀐 건 사실이었다. 사람의 말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세준이 무언가를 말할 때 수잔의 표정은 마치 촘촘한 눈금의 온도계처럼 미세하게 변했다. 사소한 말 한마디를 어떻게 이어가느냐에 따라 그들 사이가, 다시 말해 그들의 미래가 변할 수도 있음을 그때 알았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그녀의 변화를 자신이 알아채지 못할 수 있다는 거였다. 세준은 수잔이 말주변도 없는 자신을 왜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떠나갈까 봐 불안했다. 이모라는 사람을 창조해낸 것도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등록금을 국가에 빚졌을 뿐 누구에게도 손 벌린 적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주말에 데이트할 수 없는 진짜 이유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지도교수의 개를 돌보느라 어쩔 수 없다고 실토하면, 수잔뿐 아니라 그 이상을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았다.


수잔이 주택에 따라가면 안 되느냐고 전화로 물었던 날, 세준도 한참이나 전화기를 꼭 쥐고 있었다. 밤새 고민하느라 잠을 못 붙일 정도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 들통 나면 수잔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이 제안마저 거절하면, 그 역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 같았다. 수잔은 회사에 휴가계를 냈으니 이제 와 취소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아니, 취소할 수 있다고 해도 수잔이 자기 계획까지 철회할 리는 없었다. 남자 친구가 못 간다면 혼자서라도 여행을 갈 테고, 그렇게 올레길을 걷다 보면 남자 친구랑 헤어질까 고민하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일 듯했다. 게다가 수잔을 주택에 데려간다 해서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수잔은 교수를 두어 번 봤을 뿐이다. 게다가 벌써 1년이 더 지난 일이었다. 교수의 신상이 드러날 물건을 2층에 두고, 거기만 들어가지 않게 해두면 다 괜찮을 듯했다. 설마 박스 테이프를 뜯어가면서 남의 집 물건을 훔쳐보지는 않겠지.


그러니 수잔이 빠삐를 기대 이상으로 예뻐하는 걸 보고, 세준은 일단 좋은 일이라고만 여겼다. 동물의 체온이 사람을 무디게 해준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수잔이 캐리어를 1층 구석에 놓고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데, 2층에서 빠삐의 찹찹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면 대형견이 될 거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몸집, 축 늘어진 귀와 살랑거리는 꼬리가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었다. 빠삐는 몇 번 컹컹 짖더니 마룻바닥에 턱 대고 엎드려 수잔을 응시했다.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꼬리 흔드는 걸 보니 수잔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잔은 빙긋 웃더니 시선을 낮추었다. 언제 챙겨왔는지 주머니에서 간식을 꺼내 이리 오라는 투로 손짓했다. 자그마한 구슬 같은 사료. 빠삐는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곧 수잔에게 다가가 혀를 낼름거렸다.


“그거 산 거야? 얘 주려고?”


“응. 팔길래.”


“…….”


“되게 착하다. 별로 짖지도 않고.”


수잔은 고개를 들어 세준을 보았고, 빠삐는 마치 그 말이 맞다고 증명하려는 듯 수잔의 무릎에 앞발을 올렸다. 웃어도 되는 상황 같았다. 하지만 세준은 말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수잔은 이상할 만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전화로 화내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모든 게 너무 순탄하게 흘러갈 때의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이미 뭘 눈치챈 건 아닐까? 수잔은 여전히 자세를 낮춘 채 빠삐를 쓰다듬고 있었다. 세준에게는 수잔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세준은 등을 돌려 주방으로 갔다. 지금 이 행동이 어색해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주방 탁자에 걸터앉아 찬장 유리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수잔을 주택으로 초대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빠삐와 함께 산책을 나가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먹을 것과 와인을 살 생각이었다. 정원에 나가 자정까지 파티를 즐기기로 했다. 세준은 그중 무엇도 잘할 자신이 없었다. 자기 앞에 어떤 일이 놓일지, 그 결과가 어떨지 지금처럼 불안했던 적이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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