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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꿉 #1

두 사람은 원래 아주 먼 곳에 있어야 했다. 공항의 거대한 창문으로 아침 햇살을 받을 예정이었다. 비행기를 기다릴 때면 멀리 도망치듯 설레기 마련이니까.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의 제주도 여행이 취소되면서 시작하지만, 글쎄, 취소된다는 게 도대체 뭘까? 무언가를 취소하는 건 기계에나 가능한 일이다. 사람에게는 취소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여행 떠나기 이틀 전, 세준이 여행을 못 가게 되었다고 통보해왔을 때, 수잔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런 말을 전화로 하다니. 세준은 차분한 목소리로―몇 번이고 연습한 게 분명했다―떠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모의 개를 돌봐줘야 한다는 거였다. 혼자 사는 이모가 어린 셰퍼드를 키우는데, 급작스럽게 해외 출장을 떠나게 됐다고, 그래서 자신이 그 집에 며칠 머물며 개를 돌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개? 개를 돌본다고?”


수잔은 본격적으로 말싸움 준비를 했다. 다시 말해, 팔짱을 꼈다. 전화로 대화하는 중이었지만, 그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한층 다부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렸다. 세준이 할 수 있는 말은 어차피 하나뿐이었다.


“응.”


“그걸 왜 오빠가 해? 그냥 돈 주고 다른 사람 시키면 안 된대?”


수잔의 말은 점점 닦달하는 투가 되었다. 세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개가 워낙 예민해서 주위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불안에 떤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 번 돌본 적 있는 자신이 가야 한다고 했다.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다. 비슷한 얘기를 전에도 들은 적 있었다. 세준이 왜 이모네 개를 돌봐왔을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세준은 학부 등록금을 이모에게 빌렸고, 그 액수는 대학원생이 된 지금도 다 못 갚을 정도라고 했다. 이모란 작자는 그걸 빌미로 조카를 하인처럼 부렸다. 수잔이 회사에 다니는 탓에 두 사람은 주말에만 편히 만날 수 있었지만, 세준은 한 달에 한 번씩 주말에도 이모를 도와야 한다며 약속을 미뤘다.


문제는 세준의 태도였다. 연애 초기에는 미안하다며 얼굴을 붉혔으나, 언젠가부터는 얄미울 정도로 당당하게 나왔다. 첫 스텝부터 꼬였다고 수잔은 생각했다. 이모 핑계를 처음 댈 때 언짢은 티라도 내야 했는데, 분수에도 안 맞게 너그러운 척을 하다 보니 이제는 당연히 이해해줘야 하는 꼴이 되었다. 그래도 수잔은 함부로 쏘아붙이지 않았다. 욕을 하려다가도 참았고, 하고 싶은 말의 절반은 해열제인 양 삼켰다. 그렇게 몇 번이고 참아왔다. 여태까지는.


“그 개자식 이름이 뭔데?”


“……그래도 등록금 내준 분인데.”


“뭐? 아니, 이모 말고. 진짜 개 말이야.”


세준이 아아, 하고 무언가 깨닫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그다음에는 어쩐지 풀 죽은 목소리로 개의 이름이 빠삐라고 말해왔다. 수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지금은 화내야 하는 입장임을 되새기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 사람과 연애를 1년 넘게 해오면 이래서 골치 아팠다. 전화하는 동안에도 상대방 표정이 어떨지 훤히 떠오르는 것이다. 세준은 특유의 멍한 눈을 뜨고 신발코를 내려다보고 있을 터였다. 논문을 읽고 물리학에 관해 더듬더듬 이야기할 때면 눈동자에 불꽃이 튀지만, 그 순간만 지나면 배터리가 떨어진 듯 축 늘어지는 사람이었다. 수잔은 그런 세준을 볼 때마다 꼭 껴안고 입 맞추고 싶었다. 그럴 때 그의 얼굴에 피어 오르는 엷은 미소를 보고 싶었다.


수잔은 이모네 집에 따라가고 싶다고 불쑥 말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지만, 사실 안 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모네 집은 강남의 2층짜리 단독 주택이니까. 한 명쯤 더 묵을 자리는 있고도 남을 테고, 이모는 커다란 냉장고에 온 나라 요리를 채워두어 세준이 꺼내 먹게 할 만큼 관대하다고 했다. 세준은 집 풍경을 묘사해준 적도 있었다. 동화책 삽화에서처럼 고풍스러운 벽돌에 담쟁이가 엉겨 있다고 했다. 진갈색 벽지가 발려 있으며, 한쪽 벽의 통유리로 정원의 나무들이 손에 닿을 듯 일렁인다고.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2층은 원래 창고로 쓰였는데, 이모가 빠삐를 데려온 뒤로는 포근한 다락방으로 변모했다. 2층 전체가 개집인 양 강아지 장난감이며 담요며 간식 따위가 정돈되어 있다는 거였다. 어차피 제주도에 갈 수 없다면, 거기서 같이 지내면 되지 않을까? 시간만 주어진다면 수잔은 강아지랑도 금세 친해질 자신이 있었다.


세준은 일단 이모에게 물어보겠다고 답했다. 수잔은 전화 끊은 뒤에도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이모 문제로 그간 꾹 눌러 참던 짜증이 고름이 되어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동화 속 집 같은 소리 하네. 돈 좀 빌려줬다고 조카를 아무 때나 불러내서 자기 개를 돌보게 하다니, 그게 정말 가족인가? 더욱 답답한 건 세준이 이모에 대해 욕도 한마디 못 하는 거였다. 수잔이 이모를 흉보려 하면 세준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다른 곳을 보곤 했다. 이튿날 이모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같이 주택으로 가자고 전화하면서도 세준은 활기찬 기색이 아니었다. 그때 수잔의 마음속에는 벌써 이모에 대한 증오심이 배수관의 머리털처럼 엉켜 있었다. 여행이 확실히 취소된 것이다. 언론사 들어가고 처음 받은 휴가인데. 문제의 주택으로 여행 아닌 여행을 갈 날이 다가왔다. 대체 어떤 곳인지 직접 보겠다는 결의, 그리고 세준과 함께 휴가를 보낸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그날,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세준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심장이 세차게 뛰는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건 그가 수잔에게 털어놓지 않은 수많은 비밀 중 하나였다. 그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주 많았다. 경기장이나 공연장처럼 사람이 들끓는 곳을 꺼렸고, 카메라 앞에 서기를 싫어했으며, 곧 죽어도 빈말은 못 하는 성격이었다.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껑충한 키와 매끈한 얼굴, 방금 미용실에서 나온 듯한 곱슬머리 덕에 세준의 주위에는 늘 곧잘 웃는 여자들이 맴돌았다. 그러나 연애를 오래 해본 적은 없었다. 사귀자는 말 한마디로 특별한 사이가 되는 것도 납득할 수 없을뿐더러, 그렇게 인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끝도 없이 서로 애정을 표현해야 하는 강박적인 문화가 기이하기만 했다. 그래도 세준은 성격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조용히 생각에 잠기길 좋아했고, 무엇도 그를 다락방에서 끌어내지는 못할 듯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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