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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빛의 미로 #3

우리는 농담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날 밤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 진지한 목소리로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경험을 어떻게든 우습게 풀어놓곤 했는데, 예를 들자면 나는 직장에서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신입일 때도 아니었고, 일한 지 일 년쯤 되었을 무렵에 휴지를 배달하던 중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휴지는 요양원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물품이었다.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하는 노인들은 시종일관 침을 흘렸고, 식사 시간이면 침에 더해서 밥알까지 흘렸으며, 정신이 혼란한 경우에는 침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있는 힘껏 바닥에 뱉어내는 일도 많았다. 때문에 모든 생활관에서는 내선 전화로 사무실에 휴지를 달라고 경쟁하듯이 주문했다. 나는 창고의 문을 열고 휴지 박스를 뜯어내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하곤 했다.


생활관은 총 6개였다. 각각 사랑마을, 친절마을, 온기마을 등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나는 쪽지에 사랑에 휴지 2박스, 친절에 3박스 하는 식으로 메모하고는 배달을 나섰다. 내가 할 일은 각 마을의 담당 주임에게 주문한 물품을 배달해주고 서류에 확인 도장을 받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얼마 전에 진행된 구조조정 때문에 주임급에서도 인원이 교체된 점이었다. 6개 마을에 각각 한 명씩 있는 총 6명의 주임들 중에 3명이 새로운 사람이었고, 나는 그들의 얼굴을 외우지 못하고 있었다. 휴지 박스를 끌개에 싣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요양사 세 명과 주임 한 명이 안에 서 있었다. 요양사들은 요양사의 근무복을 입었고 주임은 주임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쨌든 키나 체구나 헤어스타일 등이 모두 비슷한 중년 여자들이어서 특징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확실한 점은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고 있는 주임은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것이었다. 주임은 자신이 어느 마을 소속인지를 말하고는 요양사들과 함께 휴지 2박스를 챙겼다. 저희가 가는 길이니까 챙겨갈게요. 되게 피곤해 보이시는데……. 그런 말을 듣고 얼굴이 약간 빨개지기도 했다. 나는 전날 밤도 민주의 집에서 보낸 참이었고 우리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회사에 한 명도 없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때 당황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은 곧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나는 한 층 위로 올라가야 했다.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면서 휴지를 배달할 계획이었다. 중요한 걸 잊어버렸다는 사실은 위층에 내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방금 만났던 주임이 어느 마을 주임이었더라? 사랑? 온기? 둘 중에 하나였던 것 같은데. 아니, 다른 곳이었나?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준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괜히 똑같은 곳에 두 배로 배달하고 어떤 곳에는 아예 안 줄 수도 있었다. 새삼 돌이켜보니 구조조정으로 주임이 교체된 마을이 어디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민주는 알고 있을 듯했지만, 이렇게 간단한 일도 혼자 해결 못 하는 모습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정말 별것 아니었다. 그저 휴지 배달하는 거니까. 방금 마주친 주임이 새로 온 사람이라는 건 기억했으니, 일단 위층부터 배달하면서 주임이 바뀐 곳이 어딘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구였는데? 술집에서 이 일화를 이야기할 때, 민주는 말을 끊고 결말부터 물어보았다. 당연히 결국에는 누구였는지 알아냈을 거라고 예상한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 봐야 6명의 주임 중 한 명이었고, 더 좁혀서 생각하자면 새로 온 3명 중의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주임이 누구였는지 모른다. 계획한 대로 배달을 시작할 때는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았다. 새로 온 주임이 있는 3개의 생활관이 어디인지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중에 한 곳으로 가서 주임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이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이렇게 쉬운걸. 여기는 방금 줬으니까 건너뛰고 다른 데 배달하면 끝이겠구나. 그렇게 지나쳐가는데 그 주임이 뒤에서 나를 불렀다. 왜 휴지 안 주고 그냥 가느냐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직원들의 얼굴을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팀장이었다.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우고 어디에 있느냐고 성화였다. 할 말이 없었다. 직원들이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대답할까? 내가 배달이 좀 늦었다고 말하며 우물쭈물하자, 앞에 있던 주임이 남은 휴지들도 여기 두고 가라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고 말했다.


남은 박스를 다 두고 사무실로 돌아갔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결국 알지 못한 채로. 뭔가 망신당한 기분이었어. 술집에서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맺었다. 민주는 웃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그게 내 말이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듯이 주위는 너무 시끄러웠고 내 말은 소음의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토마스 할아버지가 사라진 곳으로 뛰어가면서 나는 그게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그것은 결말이 난 이야기도 아니었다. 직원들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수백 명의 노인 중의 하나일 뿐인 토마스 할아버지는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혹시 이 동네에 다른 노인이 배회하고 있어서 사람을 혼동하면 어떻게 하지. 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불안해하며 달렸다. 그게 사치스러운 짓이라는 건 할아버지가 있었던 모퉁이에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다. 거기엔 할아버지는커녕 아무도 없었고, 내 옆에는 세 개의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


함부로 길을 택하면 안 되었다. 그랬다가는 할아버지를 정말 잃어버릴 테니까. 방금까지는 그냥 모른 척하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막상 아무도 보이지 않자 무릎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제야 뒤에 두고 온 민주를 떠올렸다. 민주는 이곳에 사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나보다 길을 잘 알 터였다. 감에 의존해서 혼자 할아버지를 뒤쫓는 것보다 민주를 데리고 와서 함께 찾으러 다니는 편이 현명할 듯했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왔던 곳도 잘 보이지 않았다. 민주의 모습도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나는 가로등에 대고 욕을 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가도 민주가 보이지 않았다. 이 길이 아닌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다른 길은 없었다. 소리 내서 민주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또 한 번 걸었는데 이번에는 신호음이 얼마 울리지도 않고 끊어졌다. 나는 내가 민주를 두고 간 게 아니라 민주가 나를 두고 갔음을 깨달았다.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우리가 하던 논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민주는 여전히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침이 되기 전까지, 혼자서라도 할아버지를 찾아서 요양원으로 데려가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누구도 해고당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민주든 할아버지든 빨리 찾아야 했다. 요양원에 있어야 할 노인을 밖에서 데리고 다니는 건 폭탄을 데굴데굴 굴리고 돌아다니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다치거나 감기에라도 걸린다면 민주는 직장을 잃을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터였다. 뛰어가면서 핸드폰의 지도 어플을 켰다.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만큼 세세하게 꼬인 골목은 지도에 다 표시되지도 않았던 터라 GPS의 빨간 점은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 라고 생각했다. 만일 민주가 나보다 먼저 할아버지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함께 움직여야 할 테니 빨리 걷지는 못할 것이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이 동네를 샅샅이 두 번은 뒤져볼 작정이었다. 고개를 드니 십자가가 첨탑 끝에 솟아 있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위치를 파악하고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왼쪽 길을 택했다. 같은 곳을 뱅뱅 돌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골목이 너무 낯설다고 느낀 건 무릎이 저릴 정도로 뛰었을 때였다. 있는 힘껏 십오 분은 뛴 듯한데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민주나 토마스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낯선 사람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문득 무서웠다. 주택들이 몰려서 이만큼 복잡한 골목을 이루었는데, 아무리 새벽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을까. 달리기를 멈추었다. 무릎을 짚고 숨을 격하게 헐떡였다. 호흡은 곧 가라앉았고 모든 게 조용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창문 중에서 불을 켠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 꼭 진짜 세상을 흉내내어 만들어놓은 세트장에서 헤매는 것 같았다. 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민주는 이미 할아버지를 찾아서 요양원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민주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혹시 아까의 다툼으로 우리의 관계가 영영 멀어져버린 건 아닐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걱정이었지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민주는 그렇게 내가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그러니까 경찰을 부르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그냥 민주를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 전화를 걸어왔다. 핸드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오랜만이라고 말할 뻔했다.     




우리는 낯선 침묵 속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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