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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맘 Apr 11. 2024

기회를 여러 번 놓치다

여자들은 참 억울하다.

결혼하고 애 낳으면 결국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여자가 손해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로 인생의 변화가 큰 쪽은 여자가 아닐까? 물론, 남자들도 인생이 변한다.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동경하는 남자들 입장에서도 그 본성이 존중받지 못하고 와이프 잔소리 이겨내며 살아야 하니 얼마나 인생이 많이 변했을까. 가장의 책임감과 의무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을까.


그래도, 남자들은 변함없이 회사를 가지 않는가!

회사와 집을 반복하며 큰 틀 안에서는 변화가 크게 있지는 않다.


하지만 먼저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으로 몸이 달라진다. 목숨 걸고 아기를 낳고 달라진 호르몬으로 인해 심한 경우 산후 우울증을 겪고 직장을 그만둔다. ‘육아휴직’이란 제도가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인식은 선입견과 편견, 따가운 시선이 가득하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나면 아이는 누가 키워주나?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지만 어린아이들은 집단생활에서 열이 나거나 몸이 아프면 이조차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국 여자들은 직장의 눈치를 보거나 그만두게 된다.


나는 출산하기 한 달 전부터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도합 15개월간 쉬면서 육아휴직 수당을 받을 수 있다. 출산 전에는 이 기간이 매우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육아휴직이 끝나면 아이는 인제 걸음마를 뗀 14개월 아기다. 기존에 다니던 기관으로 복직할 수도 있었지만 풀타임을 일하며 내 아이를 매일 저녁 6-7시까지 혼자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타 기관 파트타임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금 기관에 자리 잡기까지 나는 총 다섯 번의 기회를 놓쳤다.


첫 번째 기회는 아이가 돌이 되기 전이었다. 페이도 좋고 임상경험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는 곳이었다. 비대면 줌으로 면접을 봤는데 단번에 합격했다. 합격통보를 받은 날이 아이의 돌촬영 날이었다. 복직기념으로 남편이 아이패드까지 사줬는데 나는 이 기관에 출근조차 못하고 일의 기회를 저버렸다.

첫 출근날, 아이가 많이 아팠고 도와주시기로 했던 친정엄마까지 덩달아 아프셨다. 도저히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좋은 기회지만 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적응시키기 직전에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이곳은 약 일 년 뒤 이사하는 집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 여러모로 좋은 환경이었는데 아직 아이가 어린이집 적응이 어려운 상태라 갈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쉬운 직장이다. 이사 온 지금 오며 가며 보이기도 해서 정말 아쉽다.


세 번째, 네 번째 기회는 적절한 시기와 환경에 잘 다닐 수 있는 두 곳이었다. 일 욕심이 많은 나는 한꺼번에 두 기관을 시작했고 약 4개월간 근무했는데 가장 큰 단점은 저녁 8시가 다되어서야 일이 끝난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주 4회 정도 밤늦게서야 엄마 얼굴을 보니 힘들어했고 친정엄마도 직장을 다니시는 입장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을 꽤나 어려워하셨다. 결정적으로 아이의 언어지연이 시작된 시기였기에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섯 번째 기회는 ‘권고사직’을 받은 곳이다. 세 번째 곳보다는 비교적 일찍 일이 끝나는 곳으로 바꿨는데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코로나가 돌기 시작했고 이때만 해도 접촉대상이면 약 2주간 격리대상이니 무조건 가정보육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빼도 박도 못하게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코로나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번져 계속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자 기관 측에서 나에게

‘선생님은 가정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시며 퇴사를 요청하셨다.

아, 정말 코로나! 코로나 너는 임신과 출산부터 육아까지 여전히 끝까지 날 괴롭게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나는 당분간 일자리를 알아보지도 말고 어디 괜찮은 곳이 있나 기웃거리지도 말고 가정에 전념해야겠다 생각했다. 약 4-5개월 정도 일을 하지 않았다. 슬럼프의 기간이었다. 아이의 언어지연이 가장 심각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앞 장에서 다룬 남편의 음주운전도 겹쳤던 암흑의 시기였다. 내 일도 풀리지 않는데 내 딸의 성장도 더딘 것 같아 정말 말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다시 예전처럼 활발하게 일하는 음악치료사가 되고 싶었는데 돌아갈 수 없는 건가. 큰 욕심이었나. 예전의 나는 임상 케이스도 많고 정말 재미있고 보람차게 일했는데 지금은 그때의 기량도 나오지 않고 시간적 활용도 어려우니 참으로 답답했다.


2022년 초 한창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던 2월, 코로나가 바짝 기승을 부리나 싶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코로나 확진자가 우수수 나타나던 때였다.

확진자 수가 카운트조차 어려워지는데 정부는 거리두기 해제, 간헐적으로 마스크 해제를 예고했다.


이거, 끝나긴 끝나는 거야?


의심스러웠던 그즈음, 한 복지관에서 음악치료사 공고가 올라왔고 근무조건도 좋아 보여 이력서를 보냈다.

면접제의를 받았고 3:3 압박면접을 가뿐히 통과하고 합격했다.


시간표도 요일도 학부모 응대도 모조리 치료사인 내가 하면 되어서 참 편하다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나는 지금 2년 넘게 근무하고 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참 어려운데 이곳은 나의 모든 어려움을 이해해 주는 참 좋은 직장이었다.  


조금씩 기량이 회복되고 감도 되찾아져서 예전의 나 즉 예전의 음악치료사인 나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자주 들어서 좋았다. 자존감이 많이 회복되는 듯 자신감이 올라갔던 것 같다.


또, 해가 거듭될수록 내가 맡은 대상자들도 자리를 잡아갔고 다양한 음악치료의 좋은 기회들을 얻어 집단 음악치료 프로그램도 시작하면서 현재는 음악치료사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는 중이다.


다양한 기회 중 하나로 중고등학교 직업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강의도 오랜만에 나가게 되면서 아, 사람이 계속 힘든 것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렇게 긍정회로를 돌리다 보니 지금은 브런치 작가가 되어 내가 사랑하는 글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육아가 항상 지속적으로 힘든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아이는 언젠가 큰다. 성장해 나간다.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그 엄마도 같이 성장한다. 아이를 믿어주니 잘 커나갔다. 내 커리어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큰다. 내가 하고자 하면 못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집안일을 돌보면서, 내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말이다.


물론 내가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매일같이 전쟁을 지르며 일하는 워킹맘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음악치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참여하고 실행하면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어왔고 육아와 병행하면서 앞서 언급한 ‘암흑의 시기’도 있어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걸 내팽개치지 않고 해내어왔다.

이 글을 읽는 수많은 워킹맘들에게 힘과 용기를 드리고 싶다. 여러 번의 기회를 놓쳤지만 결국엔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엄마도 커리어를 쌓아가며 성장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다.


우리, 포기하지 말고 내팽개치지 말고 서로를 응원하고 공감하고 격려하며 한발 한발 현재를 살아가보자고 말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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