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만하면 되었다

by 노란고구마


의욕이 지나쳤다. 고근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 다리가 뜻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올레 7코스를 완주하고 이어서 7-1코스를 걷고 있었다. 당시 15코스까지 만들어져 있어서, 매일 한 코스씩 전 구간을 이주 안에 완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평소 하루 10km도 걸어본 적도 없으면서 세운 무모한 계획이었다. 안내서에 적힌 코스별 평균 소요 시간만 보고는 조금만 빠르게 걸으면 하루에 두 코스를 걷는 게 계산상으로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걷는지 보다 얼마나 빨리 다 걷느냐가 더 중요했다. 남들보다 빠르게 걸어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게 어리석은 과신이었다는 걸 몸으로 부딪쳐보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빨리 가야 한다는 목표만으로 길을 걷다 보니 길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내 에너지가 바닥나자 아름다운 풍경도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한계를 넘어서는 계획을 세웠으니 몸은 지치고 마음엔 알 수 없는 패배감만 쌓여갔다.


고근산 정상에 앉아 서귀포 앞바다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산 입구에서 본 간세가 떠올랐다. 올레길 곳곳에서 길을 안내하는 조랑말 모양의 파란 '간세'를 볼 수 있다. 머리가 향한 방향으로 길을 걸으면 되는데 ‘간세'는 제주어로 게으름쟁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에서 왔다고 한다. 목적지를 향해서 빨리 가는 대신 여유를 가지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자연과 문화를 천천히 즐기라는 의미가 담긴 올레길의 마스코트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나의 한계가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다. 무작정 가속 페달만 밟으면 엔진은 과열되고 사고의 위험이 커지기 마련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기계처럼 몰아붙이는 효율은 독이 될 뿐이다. 당시에는 몰랐던 반복된 피로가 누적되어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다.


나는 올레길을 걷는 게 아니라 마치 처리해야 할 업무를 수행하듯 길을 걷고 있었다. 이곳에서 효율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완주라는 성과를 증명하려고 제주에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처음으로 중도 포기를 결정하고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한계에 직접 부딪쳐보면 내 그릇의 크기를 알게 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한계와 실제 체력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고, 그 차이를 조금씩 메워가는 것이 여행의 과정이다.

이번에 다 걷지 못하면 다음에 다시 오면 될 일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때, 여행은 비로소 휴식이 된다.


다음 날 어김없이 몸살이 났다. 매일 쉬지 않고 수십 킬로미터를 걸었으니 체력에 한계가 온 것이다. 오전 내내 누워 있다가 오후 늦게 숙소 근처 올레 시장에 나가 성게 미역국 한 그릇을 비웠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 몸이 금세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가끔 이렇게 멈춰서 잘 쉬고 잘 먹는 것도 충분히 좋은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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