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라리 Sep 22. 2023

세상이 나의 진가를 몰라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영웅전설 : 하늘의 궤적 시리즈

인생질문 : 세상이 나의 진가를 몰라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 문제의식


2023년 영상 콘텐츠의 대세는 숏폼이다. 웃긴 내용이나 하이라이트 위주지만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는 콘텐츠도 있다. 1분이라는 시간제한은 내용의 제약을 만든다. 직관적이어야 하고 쉬워야 한다. 잠깐 스쳐 지나가기에 해석이 필요한 내용을 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SNS나 유튜브는 심심하거나 쉴 때 한다. 사람들의 이런 욕구에 맞아떨어졌기에 숏폼이 대세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SNS나 유튜브처럼 쉽고 단순하지 않다. 쉽고 빠르게 핵심만 효율적으로 소통하는 게 가능할 때가 있고, 적용하지 못하거나 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단기간에 배울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 경우는 가능하다. 특정 툴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 단기 교육을 듣는 경우, 실무에서 실제 활용도가 높은 핵심 내용을 최대한 재밌는 방법으로 배우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이 요구되는 '태도'를 익히는 경우 접근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문제해결력'을 기르는 한 학기 이상의 프로젝트 학습에서는 일의 진행이 막히게 되고 팀원들과 의견 차이가 생기는 등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어렵고 비효율적이지만 지난한 시간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회의'라는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일처리를 하기 위한 상황과 구성원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실무를 하기 위한 회의를 하는데, 계속 늘어지고 얘기가 반복된다면 다들 힘들다. 핵심적인 사안만 효율적으로 다뤄야 한다. 흔히 시간을 정해 놓고 토론하거나 의견을 빠르게 취합할 수 있는 방법을 쓴다. 그러나 평가나 발전방향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구성원들이 솔직하고 충분하게 자기 얘기를 꺼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효율적인 의견 취합보다 감성적인 접근이 필요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빨라지고 짧아지고 쉬워져야 할 것 같다. 영상뿐만 아니라 말도, 글도. 앞서 살펴봤듯이 그래야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데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도 그렇다. 인기를 얻고 대세가 되는 게임들을 보면 점점 호흡이 짧아지고 있다. 스팀 '최고 인기 게임' 차트에 장기간 머무는 게임들은 대게 판이 있는 게임들이다. 한 판은 30분 내외다. 대표적으로 호흡이 긴 게임인 RPG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RPG 같은 게임은 하면 할수록 진가가 드러나는데... 요즘같이 짧은 호흡의 게임을 선호하는 상황에서는 흥행하기 어려운 걸까?

(지역/국가마다 선호하는 장르가 다르다. 한국의 경우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숏폼처럼 빠른 시간에 효율적으로 자신을 어필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 살아 남고, 진가가 나중에 드러나는 볼수록 매력적인 사람들은 빛을 보기 힘든 것은 아닐까?



○ 학자의 대답

[법륜스님 즉문즉설] 제222회 같은 회사 여직원에게 호감. 너무 떨려요, 어떻게 (2012.1.12)

(일부 발췌, 전체 내용은 링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질문자
"26살까지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습니다. 회사에 나이 서른, 마흔 넘은 형님들이 장가 안 간 모습을 보면서 나도 결혼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최근 사무 쪽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호감이 가는데 너무 떨려서 얼굴만 봐도 속이 얼어붙는 것 같아요. '좋아하니까 밥이라도 먹자'라고 이야기하면 제가 나이도 서너 살 많은데 괜히 이상한 살마 취급받을 것 같고요. 너무 숫기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실패하는 연습을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연습하는 것도 진짜 죽겠거든요."

#1 그 여자의 사정

내 욕심만 생각하지, 상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잖아요. 상대가 지금 어떤 고민을 하는지, 집안 걱정을 하고 있는지, 남자친구를 찾고 있는 중인지 모릅니다. 남자친구를 찾는 중이라면 괜찮을 수도 있어요. 지금 다른 문제로 고민하고 있거나 연애에 관심이 없거나 승진에 골몰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가서 데이트 신청을 하면 '미친놈' 취급을 당하겠죠.

그런 욕심을 버리세요. 그런 생각이 들어도 '아이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하고 내려놓고 동생처럼 생각하세요. 그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부탁하는 게 있으면 해 주세요. 무조건 너무 해주려 들지도 말고요. 내 목표를 자꾸 내세우지 말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쪽으로요. 선물을 억지로 안겨주거나 하면 더 부작용이 생깁니다. 전화를 잠시 받아달라든지 어떤 업무를 도와달라든지 이렇게 상대가 원하는 게 있을 때 기꺼이 편안하게 해 주면 됩니다. 그러다가 또 조금 마음이 맞으면 좀 더 발전시키는 쪽으로 가면 되고요. 욕심내면 안 돼요.

질문자는 이 상태에서 당장 여자를 사귀면 상대한테 상처 입을 확률이 높습니다. 너무 연애나 결혼 같은 걸 목표로 두지 말고 그냥 성별이 여자인 사람과 '사람으로서 관계를 맺는 훈련'을 해봐요. 그거 보기보다 복잡합니다. 일단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 친구로서 가볍게 지내는 인간관계 연습을 좀 해봐야 합니다.

#2 사람은 다 이기적이다

인간관계에서 알아야 할 점은 '사람은 다 고만고만하고, 다 이기적'이라는 겁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나쁜 게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입니다. 내가 이기적인 줄 알아서 상대의 이기적인 면도 인정할 때 인간관계가 원만해집니다. 상대 보고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요. 편하게 인간관계를 맺어 봐요.

#3 나는 지금 이대로 괜찮다

자기 몸이 예쁘다고 거기에 너무 집착해도 불행을 자초하고, 자기 몸이 못 생겼다고 거기에 너무 집착해도 불행을 자초합니다. '그냥 하나의 몸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해요. 성형수술을 할 생각을 자꾸 하면 할수록, 그 생각 자체가 거기에 대한 열등의식이 생기거든요. 남들이 보기에 조금 더 예뻐질 수 있어도 자기 내면에서는 자꾸 열등의식과 거짓이 생기거든요. 남이 '너 성형했냐?' 이렇게 물으면 '했다' 하고 가볍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숨기려고 하고 뜨끔해하잖아요. 존엄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그렇게 움츠러들고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집착이 불행을 자초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떳떳한 게 가장 중요합니다.


○ 해석


법륜스님 즉문즉설에서 11년 전에 있었던 대화 내용이다. 최근 커뮤니티에 올라와 보게 됐다.

'상대방의 사정', '사람은 다 이기적이다', '나는 지금 이대로 괜찮다'

연애 고민에 대한 답변이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핵심이 들어 있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놀라운 통찰력이다. 법륜 스님의 답변의 핵심을 나의 고민("세상이 나의 진가를 몰라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에도 적용해 보았다.


내가 인정해야 할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우선 나는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점을 가장 먼저 인정해야 했다. 나는 이 정도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집착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게 시작이다.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나의 진가를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과연 다른 사람 또는 콘텐츠에 대해서 진가를 알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생각해 봤다.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애쓴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쉽게 내가 가진 선입견으로 판단한다. 내가 이기적인 것처럼 다른 사람도 이기적인 게 당연하다. 내가 그러하듯이, 나에 대한 평가의 기본값 또한 평가자의 선입견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가끔 진심을 다 해 진가를 알아봐 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내가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인정은 상대방의 몫이다. 상대방이 내 욕심에 호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한 게 아니다. 여기까지는 생각과 마음이 정리가 되긴 하는데,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는 여전히 고민된다.





게임이 답하다


이름 : 영웅전설 - 하늘의 궤적 FC / SC / TC (The Legend of Heroes: Trails in the Sky) / 전체 이용가
제작사 : Falcom (일본)
장르 : 스토리 RPG
출시일 : 2014년 7월 30일 (스팀 기준 / 최초 출시는 2006년)
  *게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다른 사이트를 참조하세요

게임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RPG 장르는 엔딩까지 50시간 내외가 필요하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엔딩까지 가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세계적으로 900만 장 이상 팔린 인기 RPG 게임 <페르소나5>의 '앤딩을 봤다'는 트로피를 확인해 보니 37.9%다. (Playstation 기준) RPG 중에서도 가장 세련된 연출으로, 정통 RPG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은 게임인데도 엔딩까지 하는 비율은 이 정도다.


오늘 답하는 게임 '영웅전설 - 하늘의 궤적'은 심지어 세 편이다. 한 편을 엔딩 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연관된 스토리로 세 편이나 출시했다. 전부 엔딩을 보는 데 최소 120시간이 걸린다. 서브 퀘스트를 적당히 하면 150시간 이상이다.


아무리 재밌다고 하더라도 엔딩까지 최소 120시간 걸릴(FC, SC만 하더라도 90시간 이상) 게임을 시작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긴 호흡 때문에 세상이 이 게임의 진가를 몰라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과연 이 게임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1) 정면돌파


내가 꼽는 이 게임의 매력은 자기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잘 살렸다는 점이다.

- 선형적이다 (스토리 전개가 정해져 있다)

- 세계관이 크다.

- 엔딩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런 특징을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스토리 전개가 정해져 있다는 점은 자유도를 중시하는 게이머에게는 큰 단점이다. 내가 게임 기획자였으면 어떻게든 자유도를 높이기 위해 애를 썼을 것 같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하고 싶은 스토리탤링을 할 수 있네" 하는 '오히려 좋아' 정신이 느껴졌다. 세계관이 크고 엔딩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은 처음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 내가 게임 기획자였으면 어떻게 하면 세계관을 쉽게 설명할지 그리고 최대한 게임을 단순해 보이게 만들고 싶어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게임은 세계관을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중간중간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설명한다. 어찌 보면 설명이 좀 부족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플레이를 하다 보니 알고 싶은 게 아직도 남았다는 점이 오히려 이 게임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2) 익숙함 속의 새로움 어필


게임의 최초 출시일이 2006년이니 상당히 오래된 게임이다. 게임장면을 보면 어디서 한 번 해본 것 같은 익숙한 JRPG다. 게다가 클리셰 덩어리다. 전형적인 권선징악 스토리, 선하고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 게다가 아무래도 옛날 게임이다 보니 빠른 이동이 없고 노가다식 전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비슷한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굳이 해볼 필요 없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 게임은 계속하고 싶게 만드는 새로움이 있다. 사소해 보이는 다음의 요소가 잘 조합되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 JRPG 게임에서 보기 드문 여자 주인공

- '유격사 지망생' -> '준 유격사' -> '정 유격사' -> '핵심 유격사' 캐릭터의 성숙 스토리

- 순서가 중요한 턴제 전투에서 순서를 무시할 수 있는 S-Break 시스템


보통 게임을 할 때는 '나=주인공'으로 몰입하기 마련인데, 이 게임은 여러 포지션을 넘나들었다. 때로는 주인공 포지션이었다가, 주인공이 절친에 공감하기도 했다가, 게임을 하고 있는 현실의 나로 돌아와 주인공을 응원하기도 했다. 특히 이 게임을 긴 시간 지속하여 엔딩까지 볼 수 있게 했던 정체성은 현실의 나 자신이었다.

- 착하지만 어리숙한 여동생 같은 존재인 '주인공'의 성장을 만드는 뿌듯함

- 걱정되는 여동생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이만큼 성숙했구나를 느끼게 되는 놀라움

- 이 모든 과정을 지루하지 않게 진행하게 만드는 전투의 재미

익숙해 보이는 JRPG게임이었지만 게임의 경험은 새로웠다.




결론


이 게임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하고 있다.

법륜스님의 말씀과 연결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 상대방의 사정 - 내가 할 수 없는 부분

2) 사람은 다 이기적이다 -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

: 호흡이 길고 선형적인 RPG를 좋아해 줄까? 게이머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는 것은 당연해.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어. 욕심내지 말고 RPG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어필하자.

3) 나는 지금 이대로 괜찮다 - 내가 할 수 있는 부분

: 나의 정체성을 어필하기, 익숙함 속의 새로움 보여주기





Q. "세상에 나의 진가를 몰라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A.

"나다운 게 뭘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 영웅전설 : 하늘의 궤적


 * 참고자료

정오의데이트. "괜찮은 사람인가? 몇 번 보고 판단하세요?'". <정오의 깜짝설문 334>. 2018년



                    

이전 07화 기후위기 해결의 주체는 누구일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