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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테나 Oct 21. 2023

전라도 시댁과 경상도 친청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불 같은 경상도 여자와 잔잔한 호수 같은 전라도 남자가 결혼했다.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크고 표현이 거친 경상도 친정식구들과 자라온 나, 그리고 조용조용하고 점잖은 전라도 시댁식구들과 자라온 그 - 문화충격이 없을 수 없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도 참 다르다.  (물론 이런 식의 일반화는 말이 안 되지만, 나의 친정과 나의 시댁은 그러하다.) 


내가 관찰한 바, 친정과 시댁의 차이는 이러하다: 


1. 목소리 볼륨 차이. 일반적인 대화도 큰 소리로 나누는 친정식구들과 달리 남편과 시댁어른들은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결혼하고 남편에게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억울했다.  (우린 원래 이렇게 말해...)  


시댁어른들과 짧게나마 시간을 보내고서야 깨달았다.  내 목소리 볼륨이 Max로 고정되어 있다는 걸.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이건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이 맞았다.  


2. 너무 솔직한 경상도 v. 너무 점잔 빼는 전라도.  무엇이든 느끼는 대로 입 밖에 내야만 하는 친정식구들과 달리, 시댁 어른들은 하고 싶은 말씀도 몇 번을 거르신다.  우리 부모님이 10을 느끼면 100으로 표현한다면, 시댁어른들은 100을 느껴도 10을 표현하신다.  감정 표현에 인색하다기보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이 건 딱 반반 섞으면 좋겠다.  긍정적인 건 더 크게 표현하고 부정적인 건 더 작게 표현하면 좋겠다.  우리의 시간은 소통과 표현으로 만들어져 가는데 긍정적인 표현에 굳이 인색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3. 방목형 친정 v. 캥거루형 시댁.  나는 자유롭게 자란 편이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부모님 두 분 다 맞벌이 셔서, 방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자유롭게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 요즘처럼 날 좋은 가을이면, 오후수업을 땡땡이치고 느긋히 하늘을 보며 걸어 다니기도 했다.  나와 달리, 부모님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착한 아들이 남편이다.  하라는 공부 착실하게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고.  


자라온 배경이 다르니 부모가 되었을 때 우리의 육아 스타일 또한 확연히 달랐다. 무관심이 답이다 생각하는 나와 각종 액티비티를 짜는 남편.  엄마가 되어보니 둘 다 적당히 필요하다.  나 같은 부모만 있어도 문제고, 그와 같은 부모만 있어도 문제다.  가끔은 남편의 육아 스타일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그 덕에 나는 조금 더 무심할 수 있었음을 안다.  육아에 있어 방목통제는 적절히 섞어줘야 한다.  




불평불만을 늘어놓아도 여태 이러고 사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시댁어른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분들께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철없는 막내아들과 결혼한, 역시나 철없는 막내며느리는 시어른들께 뭐 하나 해드린 게 없다. 멀리 사는 데다 결혼 후 캐나다 방문을 겨우 두어 번 하셨으니 얼굴을 맞댈 기회도 많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 가면 일부러 서울까지 오셔서 밥만 사주고 내려가신다.  아들 손자 다 두고 혼자 놀러 온 며느리가 뭐가 예쁘겠나 싶어 뵐 때마다 죄송하지만, 별말씀 안 하시고 잘 쉬다 가라고 하시는 분들이다.  


요 몇 해 부쩍 기력이 약해지신 시어머니는 멀리 있는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으실까. 마음 같아서는 내일이라도 당장 막내아들을 보내드리고 싶지만, 둔한 막내아들은  자기 자식 키우느라 정신이 없다.  좀 덜 바빠지면, 일이 좀 줄면, 시부모님께 엄청 잘해드려야지, 생각은 하지만 막상 짬이 나면 나 놀기 바쁜 건 왜일까.


우리의 모든 다른 점들을 지역색 따위로 묶을 수는 없다.  살다 보니 남편의 목소리가 커지고 내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처럼, 조금씩 닮아 가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하나씩 인정하고 하나씩 버리며 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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