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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테나 Oct 21. 2023

나를 견디는 그와, 그를 견디는 나.

우리가 포기한 것들

결혼 15년이 넘어가며 서로 포기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남편은 아마도 '남들과 비슷한 아내'를 포기했으리라.  나는 가끔 외박을 한다.  자의에 의한 외박도 있고, 타의에 의한 외박도 있다.  


폭설로 발이 묶여서 집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날. (집에 가다가 길바닥에서 몇 시간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

멀리 사는 베프가 우리 동네로 출장을 온 날. (오래간만에 친구와 먹고 마시고 밤새 수다를 떠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

사무실 연말 회식이 잡힌 날. (작정하고 마시는 날은 어쩔 수 없다. 대리나 택시 비용이 어마어마하다.)


나름의 이유가 다 있지만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한 외박의 경우) 아마 남편은 이렇게 답하리라 - "일단 내 주변에 너 같은 사람은 없어"  


이상하게 보자고 들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지만 (애 엄마가 무슨 외박을 하냐, 친구를 만나면 밥 먹고 차 마시고 집에 오지 무슨 술이냐, 식구들 생각은 안 하냐, 등등, 지난 십여 년간 남편에게 들어온 말이다) 정작 나 자신은 문제의식이 없다.  결국 남편은 이런 나를 포기했다. (남편이 비슷한 이유로 외박을 원하면 흔쾌히 오케이 할 생각이 있건만, 남편은 외박을 원한 적이 없다.)


나 또한 그에게서 포기한 것이 있다.  살가운 사위.  나는 부모님께 살가운 사위를 안겨드리는 것을 포기했다. 결혼 후 십여 년 간, 먼저 전화 한 통 드린 적이 없는 사람이다.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일 년에 한두 번이라 치자. 연말이나 연초 즈음에 한통, 어버이날 한 통.  물론 생신까지 챙기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내 부모님이니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먼저 전화를 드리는 건 어렵다쳐도, 내가 전화드릴 때 전화를 바꿔주는 것도 질색팔색이다.  왜인지 알 수도 없다.  뭔가 불편한가보다, 생각도 해봤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일 년에 한두 번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마저 저렇게 질겁을 낼 일인가?  내가 갑자기 죽으면 처가에 도대체 어떻게 연락을 할 건가?  자기 엄마한테 전화해서 사돈댁 전화번호를 물어볼 건가?   


화도 내보고, 진지하게 건의도 해 보았지만, 내 요구에 동의한 적도, 공감한 적도, 변화의 의지를 보인적도 없다.  그래서 그저 덮고 살았다.  다행히 언니는 나와 전혀 반대의 남자와 결혼했다. 살갑기가 평균이상인 형부가 있으니, 부모님께는 작은 사위는 그냥 없는 사람이라 치라고 말씀드렸다.  전화를 하지도, 바라지도 마시라고.  부모님은 결혼 후 5년에 한 번 정도 우리 집에 오셨다.  막상 함께 있으면 잘 웃고 이야기도 잘하는 남편인데, 장인장모 오시는 걸 불편해한다.  인정하자.  불편할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시부모님이 오셔도 불편하거나 싫지 않지만, 내가 그렇다고 남도 그런 건 아니니까.)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 전화인사 정도는 억지로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도돌이표로 돌아가는 질문이다.  


그런 그를 바꾸고 싶지만 방법을 알지 못해, 그저 포기하고 산다.  잊고 살면 또 살아진다.  이런 건 결혼 전에 이미 세팅돼서 왔어야 한다는 원망이 든다.  이런 것까지 가르쳐야 하나?  일 년에 한두 번의 통화를 요구한다는 자체가 창피하고 자괴감이 들어 마음속 한 곳에 깊이 넣어두고 자물쇠를 채워버린다.  


나 또한 완벽한 아내가 아니듯 그 또한 완벽한 남편이 아니다.  그래도 같이 사는 건, 그럴 만하니까...?  우리가 공존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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