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이 됐다. 온화한 알렉스가 히스테릭하게 반응할 때가 다가왔다. 남현이는 좀 긴장되기는 했지만 조심스럽게 알렉스의 신경질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 〕치우겠습니다. 〔 〕치우-겠-습니다.
“이게 시뮬레이션 문장이야. 그럼 남현, 앞에 뭐가 와야 해?”
“목적어?” 남현이는 알렉스와의 프로젝트를 통해 질문에 좀 감 잡았다.
“반만 맞았어. 정확히는 ‘N을/ 를’이 와야 해. 참고로 대학 부설 한국어학당 1급 초반부에 나오는 문법이야.”
남현이는 목적어가 필요한 타동사에는 ‘N을/ 를’이 나오게 설정하는 코드를 프로그램에 짜 넣었다.
“그런데 남현, ‘N을/ 를’이 나오지 않고 ‘알아서’ 이런 게 나왔다고 생각해 봐. 이 문장의 느낌이 어때?”
“‘알아서 치우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조금 건방지네.” 남현이 말했다.
“맞아. ‘알아서 치우겠습니다’의 의미가 화행보다 작으니까 화행이 결국 1보다 큰 거야. 화행이 1보다 크다는
의미는 화행을 생성값으로 가진다는 거야. 그러므로 이 문장은 하극상으로 유추해 볼 수 있어.”
|〔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 〕알-아서_치우-겠-습니다.
[형태:서술=서술, 화계:상향/ 의미:의지 표현, 화행:하극상> 1, 화행> 1]
(∴) 의지 표현<하극상
남현이는 알렉스의 설명에 따라 좌변에는 품사, 형태, 화계가 출력되도록 코드를 짰다. 이제는 알렉스가 설계한 알고리즘이 진짜 혁신적인 생성 대화문을 만들어 낼 순간이 됐다.
생성값: *제가 맡은 일은(을)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오류:화행 미반영
*제가 어질러 놓은 곳은(을)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오류:화행 미반영
화행 미반영된 문장만 산출됐다. 이건 오류 생성값이다. 문법적 오류는 없었지만 저런 말을 들으려는 직장인 사용자는 없을 것이다. JJ봇은 직장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과 문제점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용자가 경험 부족이나 판단력 부족으로 혼자 처신하기 힘든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회사에서 들은 파편적인 언어를 입력값으로 입력하면 JJ봇이 상황을 계산하여 추론과 역산하고 이를 대화로 생성해서 완벽한 생성값을 출력하는 것이었다. 이용자는 출력된 생성 대화를 실제 목소리를 통해서 들으므로 미리 문제 상황 대비를 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건 직장인의 생존을 위한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올바른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대화 맥락을 고려한 화행이 반영된 문장을 생성해 내어야만 했다. 눈치 빠른 생성 대화 JJ봇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인데 실로 어려운 과제를 남현이와 알렉스가 떠안은 것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오류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알렉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창백했다. 저러다가 냄새 때문에 그가 폭발하면 어떡할까 하는 공포가 남현이에게 밀려왔다. 남현이의 공포와 걱정이 조금씩 전자기파로 스멀스멀 출력되자 남현이 주위를 둘러싼 세계가 그 주파수 신호에 따라 연주되는 교향악단 협연 같았다. 알렉스의 등만이 어떤 파동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알렉스, 오늘은 이상한 냄새가 안 나?”
“응, 전혀 안 나.”
알렉스는 집요했다. 화행 미반영 오류를 접한 뒤 그는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남현이가 그를 불러도 그는 예전처럼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옥스퍼드대 수학과 출신의 집중력과 체력은 저런 것일까? 남현이가 옆에 다가가도 알렉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득 옥스퍼드대보다는 케임브리지대 수학과가 전 세계 대학 순위 1위라는 신문 기사를 읽은 것이 떠올랐다. 그런 순위가 알렉스의 취업에 고배를 안겨 줘서 한국까지 왔을까, 그래서 미세한 실수로 케임브리지대에 밀려서 지금도 오류를 산출해 낸 것일까 하는 남현이는 이런 비생산적인 생각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왜냐하면 알렉스가 남현이에게 어떤 코드를 짜 넣으라는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정적 화행 결정면’ 수식을 수정하는 데 매진했다.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 수리 공식:의미<-1, 화행> 1
알렉스는 처음에 세운 이 수식에 문제가 없었는지 냉엄하게 살펴봤다. 남현이는 알렉스가 빨리 오류 지점을 찾았으면 했다. 그는 꿈쩍하지 않았고 저러다가 미쳐 죽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그러나 알렉스는 남현이의 이전 PM들처럼 불같이 화내거나 남현이를 갈구지 않았다. 컴퓨터와 혼연일체를 이루던 알렉스는 돌연 여자 친구랑 한강에서 치맥 좀 하면서 머리 좀 시키겠다면서 조퇴했다. 할 일이 없어진 남현이는 대충 시간 좀 보내다가 퇴근했다.
집으로 돌아온 남현이는 평소대로라면 컴퓨터 앞에 앉았을 테지만 이날은 샤워 후 곧장 침대에 누웠다. 오류를 잡아내려고 온 힘을 쏟은 알렉스를 바라만 보는 것도 힘든 일이었나 보다. 그는 유튜브에 올라온 분자 구조로 만든 수면 유도 음악을 들었다. 음악의 끝자락의 멜로디가 울렁거렸다. 어딘가에서 싱그럽고 시큼한 향이 풍겼다. 입가를 적시는 딸기 즙이 감미로웠다. 어딘지 젊어 보이는 여인이 소반에 갓 딴 딸기를 한가득 담아 왔다. 라면을 ‘후루룩’ 불면서 삼키는 소리는 입술을 작은 동그라미 모양으로 오므려서 바람을 불어야 하는 ‘ㅜ’ 모음 때문인지 어딘가 둔탁하다. ‘흐르륵’이라고 형태도 모양도 없는 ‘ㅡ’모음을 넣으니 방정맞고 촐랑대는 것이 맛을 표현하는 소리가 아닌 것 같다. ‘쯔으윽 후룩’도 과즙이 풍부한 딸기를 베어 먹는 소리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묘령의 그녀와 남현이는 그렇게 신나게 딸기를 먹었다. 딸기를 집은 손목 아래로 과즙이 줄줄 흘러내렸다. 흐르는 과즙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건 깔끔하고 가볍지 않은 끈적거리고 텁텁한 정신 상태에서나 쏟아져 나올 법한 기괴한 풍경이었다. 곧 남현이는 몸을 꿈틀거렸다. 강한 파동이 남현이를 헤집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큰 파동으로 남현이는 침대에서 떨어졌고 정신을 차려 보니 휴대 전화 진동음이 컴퓨터 책상과 부딪치면서 집 안을 뒤흔들고 있었다. 알렉스의 긴급한 호출이었다. AI가 추천 아이템으로 소개해 준 ‘천연 향 딸기 디퓨저’ 마개를 닫고 잠을 자야 하는 걸 잊어버렸다. 당황한 나머지 남현이는 열려 있던 마개를 얼른 닫고 회사로 출동했다.
-6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