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식에 오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로부터 JJ봇 프로젝트는 신속히 진행됐다. 기존 작업에 새로 추가된 작업은 토큰화된 자연어 데이터에서 ‘배출 어휘’를 0과 1로 세밀하게 분류해서 어떻게 프로그램 언어로 변환할지 논리를 세워야 했다.
| 똥-묻-으ㄴ_ 개-가_겨_묻-으ㄴ_개_나무라-네,_진짜.
| 오늘_아침-에_ 늦-어서_머리-도_못_감-고_해서_똥-머리_하-고_와-았-어.
| 와_진짜_똥X-를_빠-네.
알렉스는 수식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기쁨과 악취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끝없이 밀려드는 ‘결정적 화행 결정면’ 정확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배출 어휘의 분류 논리를 세우는 일에 슬슬 신경이 예민해졌다. 알렉스가 남현이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내용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했다. 온갖 불쾌한 어휘의 의미를 알아 가는 상황이 달갑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2주 동안 영국에서 쉴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프로젝트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남현이에게 내려진 업무는 화행 결정면에 혼선을 주는 변수, ‘배출 어휘’를 0과 1인 ‘비트’로 구현해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메일 끝에는 남현이의 노고가 결국 생성 대화 JJ봇의 문장 생성 능력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남현이는 ‘밑거름되다’를 읊조리면서 좀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알렉스가 남현이의 노고가 ‘자양분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처음으로 알렉스에게 서운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끝까지 동료를 위한 배려심을 잊지 않았다. 자기가 없는 2주 동안 재택근무를 해도 좋다고 했다. PM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전했다.
재택근무를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은 후에 남현이는 컴퓨터 앞에 있는 의자를 유심히 살폈다. 종일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다는 그것에 처음 앉아 보는 것처럼 앉아 봤다. 이 의자를 회사로부터 배송받은 첫날 에스앤에스가 아니라 소셜미디어에 셀카를 찍어 올렸었다. 멋진 부러움과 격려의 의미로 아주 가벼운 소리 없는 하트만 쏘아 대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떠올랐다. 이 의자에 앉아서 일하기에는 너무나도 가벼운 남현이가 알렉스의 지시를 따르려고 일을 시작하려던 찰나,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맥스웰의 전자기학 책 옆에 놓인 AI가 추천해 준 인기 최고 ‘천연 딸기 향’ 디퓨저 마개를 열었다. 왜 이게 닫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전에 알렉스가 급히 호출해서 뛰어나가는 바람에 전자기파 이상으로 루틴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다는 걸 기억해 냈다. 남현이는 얼른 디퓨저에 스틱을 몇 개 더 꽂아 놓고 강한 향이 퍼지도록 했다.
천연 딸기 향 덕분이었는지 남현이는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무탈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간혹 중간 점검으로 PM이 주관하는 온라인 회의에 참석해서 알렉스를 만나곤 했다. 알렉스는 런던에 잠시 있다가 잉글랜드 남부에 있는 항구 도시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배출 어휘’ 트라우마에서 많이 회복된 듯 보였다. 남현이는 문득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천연 딸기 향 디퓨저를 보았다. 영국 남부 해안선은 참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특히 침식된 절벽에 내려앉는 노을이 장관이라고 하던데 남현이는 화상 카메라를 통해 새삼 알렉스가 생강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알렉스가 이제 곧 서울로 돌아올 거니 이에 맞춰 재택근무도 종료될 것이라고 했다. 재빨리 JJ봇 프로젝트를 끝내야 하는 것에 모두 동의하면서 온라인 회의 화면이 툭 하고 꺼졌다.
알렉스가 영국으로 도피하다시피 휴가를 선택한 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차라리 회사에서 근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현이는 어떤 진창에 자꾸 빠져드는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전송되는 알렉스의 업무 지시는 아주 정확했다. 유럽 사람들은 휴가와 일을 아주 철저히 분리해서 생활한다고 얼핏 들은 것 같았는데 알렉스는 휴가 동안 업무 공백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남현이도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했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시간이 참 흐르지 않는 것 같았는데 하다 보니까 창문 너머로 노을 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방 안으로 스미는 퇴근 시간이 되면 그는 천연 딸기 향 디퓨저에 꽂혀 있던 스틱을 빼놓고 마개를 덮었다. 그나마 남현이가 자신을 볼 아주 적은 시간이 주어졌다.
어둠이 성큼 다가온 밤이었다. 그날 밤도 남현이는 어김없이 분자 구조 음악을 들으면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지금까지도 우주 어딘가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은하철도 999의 존재를 알리는 것 같았다. 남현이에게 꼭 무슨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했다. 죽지 않고 평생 우주를 떠도는 일은 한편으로는 낭만적일 거라는 생각에 몰입하는 사이 분자 구조 음악이 끝나 버렸다. 자동 재생으로 뒤이어 나온 영상은 코스모스 다큐멘터리에 관한 것이었다. 남현이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인 물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만으로도 그는 뭔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간 남현이를 짓눌렀던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떨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분명 업무 종료와 함께 마개를 덮어 놓았던 디퓨저에서 강한 천연 딸기 향이 새어 나오는 것같이 집 안에는 상큼한 어느 겨울이 도래했다.
-8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