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만으로도 뭔가 있을 것 같은 판교를 뒤로 하고 남현이는 퇴근했다. 최첨단 설비로 지은 건물에 로봇이 소립자 단위 안정감을 지닌 채 돌아다녔다. 낯선 침입자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남현이는 사옥을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간단히 샤워한 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는데도 컴퓨터가 싫지 않았다. 재택근무를 지원해 준다면서 회사가 보낸 명품 의자가 떠받드는 남현이는 육체와 뇌, 뇌의 정신 이 모두를 합해도 결코 묵직한 인간은 아니었다. 의자는 당장 중고 거래 시장에 내다 팔아도 제값 받을 수 있는 상태였다. 남현이를 둘러싼 현재 조건은 최상이었다. 컴퓨터 옆에 걸린 합판인데 원목이라고 마케팅한 힙한 인테리어 거울을 쳐다보았다. ‘워러’라고 한번 발음해 본 후에 ‘오터’라고도 발음해 봤다. 서울로 올라온 첫 번째 이유는 토익 공부를 하러 온 것이었다는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곧바로 남현이는 프로그래머용 키보드를 쳤는데 그 촉감이 묵직했다. 조심스럽게 알렉스의 이름과 회사명을 구글 검색창에 입력했다. 개발자 알렉스로 추정되는 사람의 이력서 링크를 클릭했다.
옥스퍼드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남현이가 옥스퍼드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푸른색 겉표지에 벽돌처럼 두꺼운 사전을 만드는 곳이라는 정보가 전부였다. 남현이의 추측 즉, ‘알렉스는 문과일 것이다’라는 명제가 참일 순간이 다가왔다. 자세히 알렉스의 프로필을 살펴봤다. ‘오 마이 갓’이라고 남현이는 중얼거렸다. 그는 뼛속까지 ‘널드’인 녀석이었다. ‘범생이’라고 놀려 먹어도 불충분한 모범생 중의 모범생인 그는 놀랄 만한 스펙의 소유자였는데 다름 아닌 그는 옥스퍼드대 수학과 전공자였다.
그는 왜 여기로 온 것일까? 남현이는 또 궁금해졌다. 머리만 좋았지 집안 형편은 어려운, 다소 부유하지 못했던 앵글로색슨족이라서 돈 때문에 판교에 취업한 것일까? 돈이라면 영국에도 고액 연봉을 받을 곳이 많았을 텐데. 아니면 한국인 여자 친구를 영국에서 만난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 때문이었을까? 혹시 그도 블링크인가? 도대체 왜?
주변이 파동처럼 울렁거리면서 어그러졌다. 맥스웰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세계는 모두 파동, 전자기파의 산물이라고 했다. 남현이 회사가 운영하는 유명 블로거가 올린 글을 출근길에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울러 그에 따르면 인생의 풍파를 막기 위해서는 파동이 평소에 작게라도 움직여 줘야 나중에 발생할 파동도 작아진다고 했다. 따라서 잔잔한 울렁거림은 미래의 파괴적인 파동을 방지하기 때문에 현재의 흔들거림은 중요한 것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남현이는 비이과생이 결단코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누군가의 파편과 같은 정보라도 과학적이라면 일단 과학적인 사고를 따르는 편이 옳은 것이었다. 어쨌든 누군가는 철저한 검증을 했을 터. 검증한 후에 도출된 결과를 남현이는 지지해야 했다.
파동에 넘실거리는 책장 사이로 책 한 권이 보였다. 전자기학에 관해 설명한 글에 감동해서 그날 곧장 구입한 책이었다. 그러나 읽지 않은 채 책은 책장에 꽂혀 있기만 했다. 전자파에 펄럭이는 팔을 뻗어 그걸 집었다. 지금 남현이가 알렉스와 개발하는 대화 생성 JJ봇은 인간 신경망을 모사한 여러 인공 신경망 중에서도 트랜스포머 AI를 적용할 것이라는 PM이 한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남현이도 지금은 코드만 짜는 역할만 하지만 파동만 잘 타면 언젠가 남현이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입성을 인도하는 파동을 만날 거란 과학적 결론에 이르렀다. 남현이는 그 책을 잡았고 소립자 세계로 흡수되는 것처럼 거기에 빨려 들어갔다.
교감하는 출근길은 마치 700W 출력 전자레인지가 가루 혼합 브라우니를 쫄깃한 브라우니로 즉석 베이킹해 주는 것과 같았다. 전자기파는 미세 입자를 고체로 만들어 주기도 했고 고체 버터를 액체로 변환해 주기도 했다. 남현이의 오늘 아침은 이전과 달랐다. 전자레인지에 들어가서 몸 이곳저곳을 위생 소독하고 나온 것처럼 한결 가벼워지고 청아해진 느낌이었다. 남현이를 향해 오던 택배 처리 로봇이 훅 관통하는 것처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남현이는 알렉스에게 그의 스펙에 대해 솔직히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초경량 소재로 만든 보잉 드림라이너 787기가 경쾌하게 하늘을 향해 이륙하는 것처럼 알렉스는 벌써 경쾌하게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남현이는 알렉스를 보자 우리가 왜 트랜스포머 AI를 JJ봇에 적용하는가가 궁금해졌다. 남현이가 멀뚱거리는 눈빛으로 계속 알렉스를 바라보니 그는 언제나 준비됐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남현이에게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우리는 모스 부호를 해독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말 대신 말의 의미를 전달하는 수신호로 의사소통하는 것 같았다. 알렉스와 남현이는 그렇게 꽤 괜찮은 팀 개발자가 돼 가고 있었다.
“남현, 영어로 쓰인 책을 읽을 때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어떻게 해? 사전을 못 찾는다면?”
“문장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뒤에 있는 문장을 열심히 읽어.”
“바로 그거야.”
알렉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화이트보드에 여러 가지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설명을 위한 개념어를 휘갈기며 써 내려갔다. JJ봇은 마치 자각이 있는 것처럼 직접 대화문을 생성하는 것인데 사용자가 듣는 생성 문장을 생성값이라고 했다. 이 생성값은 뒤에 배치된 문장의 의미를 역산하면 얻어 낼 수 있다고 했다. 남현이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글을 읽을 때는 보통 앞에서 뒤로 가면서 읽는데 모르는 어휘를 마주하게 되면 뒤 문장 읽기를 통해 앞 문장의 의미를 추론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것을 문장으로 생성해 내는 것은 나열 순서에서 얻는 것보다 역산을 통해 생성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이에 트랜스포머 AI가 이런 언어의 의미 유추에 잘 맞는 인공지능 신경망이라고 했다.
“남현, 이제 우리가 설정한 알고리즘에 서술어만 넣어서 문장을 생성해 보자고.”
알렉스가 잠시 물 좀 마시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그가 판서한 수식과 좌변, 우변을 그려 놓은 알고리즘을 바라봤다. 마치 대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그림과 같았다. 남현이는 언제 이런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을까 상상해 봤다. 그때 저 멀리서 알렉스가 남현이를 찾는 떨림을 들었다. 시뮬레이션은 데모 JJ봇이 있는 실험실에서 하자는 것이었다. 남현이는 미끄러지듯이 그곳으로 이동했다.
-5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