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재미로만 말하다
주인이 내게 그렇게도 각인시켜 주려고 했던 근원은 결국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됐다. 콘텐츠 속에서 나의 부모는 나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곤 했다. 아버지는 영향력 있는 집안의 공무원 캐릭터였고 어머니는 전업주부로 시작했지만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부동산 자산을 축적한 여자 캐릭터였다.
나는 그들 안에서 아무 문제 없이 자랐고 태평하게 흐르는 일상을 어떻게 하면 더 빛나게 할 수 있을까 그림 그리는 도구로서 글을 쓰는 자아로 설정됐다. 이 콘텐츠는 큰 수익은 내지는 않았지만 게임 회사가 내세우는 유익한 콘텐츠 게임의 표본으로 채택됐다. 유저1과 유저2는 또 수익을 냈다. 그러자 유저3과 유저4는 내게는 애당초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는 캐릭터로 설정했다. 부모 대신에 부모와 같은 기계 신에게 나에 대한 물음을 찾는 것으로 콘텐츠를 구성했다. 나는 편리성이라는 유희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했다. 현실의 내가 부모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때 그 미지의 세계를 탐독하고 더 나아가서는 더 큰 세계를 이해한다는 전통적 구성은 프로그램의 오류를 도울 뿐 아무 쓸모가 없게 돼 버렸다. 우주를 아는 것보다는 가상의 세계에 기생하여 현실과 같은 다양하고 즐거운 현실을 구성하는 세계가 이제 이야기의 세계가 돼 버렸다.
주인과 나는 콘텐츠 카페에서 마주했다. 그가 나를 생산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시간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자각이 제거된 캐릭터로 변형된 나는 주인 앞에서 슬픔을 지어 보일 수도 없었다. 유희만을 표현하는 것이 이젠 내게 더 익숙한 것이 돼 버렸다. 그는 내게 이야기를 건네려고 했지만 그것은 전달되지 않았다. 손가락을 직접 움직여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지금은 클릭 몇 번으로 연결됐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곳 말고도 바로 옆 동네에도 이런 콘텐츠 카페는 즐비했다. 물론 텍스트를 이용한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그럼에도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는 의견도 있어 나에 대한 논쟁은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한다. 다만 이 논쟁에 나의 주인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