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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ree Ways Nov 28. 2022

우리 지수가 준 동치미로 만든 국수

제주에 한 달 살기 하러 내려갔다가 일 년 살기를 하고 있는 우리 지수가 있습니다. 우리 지수를 처음 만난 해가 1985년 아직 겨울의 한기가 남아있던 초봄이었습니다. 우린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이었습니다. 공대 아름이라는 말이 나오기 한 참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공대 아름이가 대명사처럼 된 건가요?     


지금은 아마 공과대학에서도 여학우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로 드문 경우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나 별반 다름없이 수컷들만 득실거리는 곳이어서 호모 로맨티 쿠스로 문명화되기엔 좋지 않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우리 지수가 입학을 한 거였어요. 고등학교 때는 키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더랬습니다.(아, 굴욕적인 한자리 번호가 생각나는군요) 대학은 역시 다르더군요. 문명사회답게 ‘가나다’ 순으로 학번을 부여했습니다. 우리 지수와 저는 ‘ㅂ’ 돌림이어서 꽤나 자주 붙어 다녔습니다.      


친해서 붙어 다닌 건 아니고, 그냥 같은 실험조라서요. 실험이라는 것이 굉장히 귀찮은 과목이에요. 시간도 많이 뺏기면서 달랑 1학점짜리 였거든요. 그래도 전 실험이 좋았습니다. 우리 지수랑 꼭 붙어서 콩과 콩깍지처럼 다닐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많이 말랑말랑해졌지만 그때는 호모 로맨티 쿠스와는 거리가 아주 먼 ‘고무줄 끊어먹기’를 즐겨하던 원시인에 가깝던 때라 좋아도 좋다고 말을 못 했어요.     


게다가 우리 지수는 고등학교 때부터 동네에서 같이 자란 남자 친구가 이미 있었거든요. 그날도 실험을 해야 하는 날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휴강이 되어서 시간이 갑자기 남게 되었습니다. 동인천에 가면 ‘애관극장’이 있었어요.(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인디애너 존스’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러 가자고 했어요. 심심했던지 우리 지수도 순순히 따라오더군요. 물론 우리 지수만 따라왔으면 좋았겠지만 눈치 없는 또 다른 ‘ㅂ’ 돌림 녀석이 따라붙더군요. 그때 그놈을 그냥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암튼 셋이서 영화를 보고 밥도 먹고 하다가 눈치 없는 녀석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우리 지수에게 고백 비슷한 것을 얼른 했어요.(아이고, 못났다 못났어) 화장실에 가서 빠져 죽었으면 했던 ‘ㅂ’ 돌림 녀석이 금방 돌아 오더군요.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나의 역사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있었을 텐데 말이죠.      


시간은 흐르고 이제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우리 지수와는 그렇게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우리 지수는 없고 ‘ㅂ’ 돌림 녀석은 있더군요. 우리 지수가 없어지고 나니 ‘ㅂ’ 돌림 녀석도 더 이상 밉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녀석이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아이는 참 착했거든요. 여름방학 때는 우리 집에도 놀러 왔었다니까요. 영화도 같이 가는 친한 사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니 참 눈치가 없죠.      


우리 지수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더 지난 다음이었어요. 간간히 동기들 소식을 잘 알고 있는 녀석으로부터 결혼을 했다, 아이를 가졌다, 서산인가 하는 시골로 신랑을 따라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있었습니다.     


어느 해 따뜻한 봄이었는데요. 눈치 없는 ‘ㅂ’이 우리 지수의 전화번호를 누구한테 들었다며 전해주었습니다. 시간도 벌써 20 하고도 몇 년이 흘렀잖아요. 서산에 지나가는 길이라며 전화를 했습니다. 엄청 떨렸냐고요. 아니오. 기분이 덤덤했습니다. 그냥 대학교 동창이잖아요. 엄청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더라고요. 신랑과 함께 그날 새조개도 얻어먹고 수다도 같이 좀 떨다가 헤어졌어요. 신랑이 양아치 같은 놈이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지만 저보다 훨씬 잘생기고 다정한 사람이라서 다행이었어요. 신랑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가 하면요. 늦가을이 되면 ‘석화’를 한 상자 우리 집에 보내주기도 했다니까요. 아내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하기도 해요.      


‘이거나 먹고 제발 떨어져 주라’     


서산에 살던 우리 지수는 그곳을 떠나 용인으로 이사했습니다. 용인은 서울에서 가깝잖아요. 용인에 왔는데 점심이나 한번 먹자고 전화했더니, 서울로 이사 갔다고 하더군요. 이사 갔다고 뽀르르 전화해서 찾아가면 ‘가오’가 서지 않잖아요. 그렇게 한참 뜸을 들인 후에 한번 보자고 전화했더니 제주로 이사를 갔다고 하더군요. 이 장면을 우리 집 아이는 이렇게 해석해요.     


‘아빠야말로 눈치가 없다. 지수 이모가 아빠를 피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어째 아빠만 모르고 있냐’     


그럴 리가 없다고 해주었습니다. 우리 지수에게 전화로 우리 집 아이가 이렇게 말을 하더라 했더니 숨이 넘어갑니다. 제주에 꼭 놀러 오라고 당부까지 합니다. 아이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여전히 아빠가 눈치 없다고 타박을 합니다.     


드디어 제주에서 우리 지수를 다시 만났습니다. 어차피 깍두기들도 있는 터라 제주에 살고 있던 용진이도 같이 보자고 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처음 만난 용진이도 우리 지수를 너무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잠시 살인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 참기를 잘했습니다. 용진이가 마음에 두었던 친구는 ‘현진’이라고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주도의 흑돼지 고깃값도 용진이가 기분 좋게 ‘쏘았기’에 더없이 좋았습니다. 깍두기들도 제법 잘 어울려 수다를 떨어주더군요. 우리 지수를 위하여 꽃도 한 다발 사 왔고요. (여기서 깍두기란 지금사진작가와 지마음작가를 의미하는 대명사입니다.)     


우리 지수가 환하게 웃는 모습도 좋았고, 용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제가 쓴 책이라며 선물도 해주었습니다. 비행기 타고 내려오는 길에 생각해 두었던 우리 지수를 위한 특별한 문구도 제 사인 밑에 예쁘게 써넣었습니다.     


'그대들과 함께 보낸 꽃처럼 아름답던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그리워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남아있는 날들이 반짝일 수 있도록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요'     


사실 ‘그대와’라고 쓰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대들과’로 바꾸었습니다. 용진이도 그렇고 눈치 없는 ‘ㅂ’도 사실은 꽃처럼 아름답던 시절에 만난 친구들이니까요.     


이런 우리 지수가 깍두기들과 저를 위해 동치미를 가져왔습니다. 그냥 떠먹어도 되겠지만 동치미가 메인이 될 수 있는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잘하는 면요리. 국수를 어찌 끓여야 맛있는지는 이미 설명드렸습니다. 잘 삶은 국수에 동치미를 부어서 동치미 국수를 만들었습니다. 다행히 맛있다고 합니다. 맛이 없을 수가 없지요. 우리 지수가 만들어 준 동치미인걸요.     



서울로 올라와서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해주었습니다. 아내는 웬일인지 저보고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칭찬을 합니다. 제가 확실히 좋은 사람은 잘 구별해 냅니다. 지금의 아내와 같이 살고 있는 걸 보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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