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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해 Feb 24. 2023

4.  3인3색의 사랑

누구나 비밀은 있다2

어떤 심경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 생경한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아영이는 무슨 마음인 걸까, 박새처럼 귀여운 아영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영이를 앞으로 어찌 대해야 하는지 그런데 잃고 싶지는 않은 아영이. 여전히 아영이가 좋은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영이의 고백이 그녀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고 입술은 아직 뜨거웠다. 겨우 잠든 몸은 정신이 깨어나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온몸이 불덩이가 되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붙었다. 혹독한 감기다. 주치의가 다녀갔지만 그녀의 열이 금세 잡히지 않았다. 사흘 동안 열은 가연 몸속의 수분을 다 태우려는 듯 극성을 부리다 떨어졌다.

몸이 회복되고 학교에 가려니 지금껏 상관없었던 모든 것이 걸리적거렸다. 아영이도 학교도 불편스러울 것 같았다. 교실 문을 들어섰을 때 시선들이 가연을 향했다. 익숙한 시선이다. 그녀는 퀸이지 않은가. 그 시선들 중에 아영이도 있었다. 아팠던 그녀보다 더 해쓱해진 모습으로 다가왔다.


 


“걱정했어. 그날 너 많이 떨었잖아. 이제 괜찮은 거야?”


 


가연은 걱정하는 아영이의 목소리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생각의 추가 멈추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고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퀸과 프린세스같이 어울렸던 두 친구였다. 교실엔 의아하다는 듯 눈 맞춤이 오고 갔고 그 안에서 아영이가 얼어갔다. 이렇게 가져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가연은 여전히 아영이가 좋다. 그것이 가연에게 오히려 혼란이었고 그녀 스스로 이해와 해석이 필요했다. 답을 찾기 전 가연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아영이와는.     


 


함께 하던 교정 내 모든 곳에서 아영이와 거리가 생겼다. 아영이는 감정에 직진인 아이였다.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지만 가연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혼란과 두려움에 대처하는 그녀의 방식이다. 아버지가 바라는 맏딸의 모습은 언제나 절제였고 가연은 그것을 무엇도 하지 않는 무기력으로 적응시켰다.



“마음을 보여선 안돼. 상대에게 칼을 쥐여 주는 격이지. 그것은 시작도 하기 전 지는 게임이다.”



가연은 검열을 거치지 못한 잘못된 삶의 방식에 오래도록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있었다     


아영이와 거리를 두었다 해도 관심을 저버리진 않았다. 가연의 시야 대부분에 아영이가 있었다. 한 시야 속엔 남자 동급생과 아영이가 담기기도 했다. 흔한 모습이다. 아영이는 많은 남학생들의 워너비로 뽑히곤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꽤나 눈에 띄는 남학생들도 있었는데 아영이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땐 왜 몰랐을까. 타인의 감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번 동급생은 분위기가 달랐다. 아영이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어미 잃은 작은 새 같았다. 동급생은 끈질기게 아영이를 놓아주지 않았고 며칠 동안 여러 번 아영이와 동급생이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영이는 점점 표정을 잃어 갔고 그 눈으로 멀리서 가연을 바라보곤 했다. 아영이와 동급생이 몹시 신경이 쓰였지만 가연은 아직 무시 말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가연의 마음속 문제가 많았기에 하루하루가 참 더디 가는 것 같았다. 그중 한 날 학교가 요동쳤다. 아영이가 고백을 받아주지 않자 동급생은 아영이의 비밀을 가십거리로 만들었다. 퀸에게 입을 맞추던 날 그 동급생이 있었다. 동급생은 고백하고 설득하고 겁박하는 순서에도 아영이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최후엔 치졸하고 추악한 복수를 자행한 것이다. 퀸과의 거리에서 이미 길을 잃어버린 작은 새는 동급생이 뿌려놓은 가시밭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가십의 중심에 퀸도 오르내렸다. 아영이는 그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더러워”


말 한 번 섞지 않던 학우들이 뱉어낸 말이었다.

가연은 이제 확실히 학교가 불편해졌다. 화가 나는 것인지 수치스러운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녀 안에 혼란이 더 커졌다. 그녀는 아영이에게 주었던 시선마저 거두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영이는 그 사이 섬이 되었다. 조롱과 외면이 혼재된 섬이다. 아영이는 그 섬에서 스스로 나올 힘을 아직 키우지 못했다. 창가로 저벅저벅 걸어간 아영이는 몸을 툭 던졌다.


 

“아악”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알에서 막 깨어나 눈도 뜨지 못한 채 둥지를 더듬거리다 추락한 어린 새처럼 아영이는 떨어졌다. 연약하고 가여운 어린 새의 숨은 남아있었지만 뼈마디는 학우들의 시선만큼 부서졌다. 최악은 면했어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아영이의 회복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면서 학교는 ‘18세, 그럴 수 있는 나이’로 정리했다. 그렇게 조용히 빠르게 묻혔고 아영이를 더는 볼 수 없었다.



가연은 알고 있었다. 아영이가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을. 아영이는 언제나 감정에 솔직하게 직진인 아이였다. 가연은 아영이에게 거리를 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영이의 손을 잡고 언제 가는 그리스에 가보자고 할 수도 있었다. 친구의 모습이든 사랑의 모습이든 혼란을 무시로 대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가연은 자신이 아영이에게 가장 큰 상처였을 거라는 생각에 몸에 남아있던 모든 수분이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아영이가 없는 학교가 가장 불편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가연의 아버지는 말라가는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대로 두었다간 그녀의 가치가 바닥을 칠 것 만 같았다. 그간의 공이 무너지게 두는 것은 아버지의 방식이 아니다. 그렇게 가연은 서둘러 뉴욕으로 보내졌고 오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보기에 가연은 여전히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빠를수록 좋았다. 가연은 돌아오자마자 마켓에 놓였고 첫 시연에 원하는 곳에 팔렸다. 23세 아직 어린 나이다.


가연은 그녀 스스로에 대한 환멸을 치유하고 아버지에 대한 내면적 독립을 이루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녀는 그러한 성숙의 과정을 어느 곳에서도 도움 받지 못했다. 다만 첫 시연에서 만난 연석은 어렴풋이 느꼈다. 가연이 지쳐있다는 것을. 가연은 첫 만남인 연석을 택했다. 쉬고 싶었다. 쉴 곳이 필요했다. 연석은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그녀 아버지와 달랐다. 가연은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가족은 제시간에 맞추어 모였다. 가연의 아버지는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 둘러보며 만족감에 도취되셨다. 아버지의 로드맵이 성공적으로 완성된 듯 보였다. 그녀는 매년 장기판의 말처럼 놀아난 기분을 겪어야 했다. 역시 오늘도 극도로 불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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