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화

악마 혹은 타락천사

by 제나랑


멀리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상황을 지켜보던 욱은

자기 직원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해주가 처리하는 방식이 일반 회사 대표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그저 무례한 악마가 아닌 그 안에 다른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해주, 정 실장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의문이 생겼다.


"정 실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대표님은 타락천사 에요? 아니면 악마 에요?"


"제가 알기론 비슷하지만 다른데 타락천사는 신분이 천사였다가 죄를 지어 인간세계로 쫓겨난 천사인데 대표님은 확실히 그쪽은 아니시죠.

다만, 인간이었던 전생에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에 방금 같은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악마로 환생했더라도 남아 있는 기억은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물론, 그 모든 것에는 '신'의 뜻이 있는 거겠죠."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정 실장은 해주에게 태블릿 PC를 건넨다.


"말씀하신 자료 메일 왔습니다."


HS필름 이 대표가 말한 시나리오와 장 욱의 프로필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욱은 해주가 뭘 읽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혹여 방해될까 조용히 노트북 앞에 앉는다.

하지만 쓰던 시나리오가 막힌 채로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계속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느라 키보드만 혹사당하는 중이다.


어느새 카페와 경계선에 있는 아치월에 팔짱 낀 채 기대어 있는 해주


"왜~ 그냥 뿌시지 그래?"


"아..시끄러우셨어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너도 계약서 써야겠다."


"네?"


계약서라는 말에 욱은 갑자기 긴장한 얼굴을 하고 해주는 그런 욱의 얼굴을 보고 실소를 터뜨린다.


"뭘 놀래ㅋ 악마 계약서 말고~ 말하자면 근로 계약서 같은 거지."


해주는 욱의 노트북 옆에 계약서와 만년필 하나를 올려둔다.

욱의 그 계약서 사항 하나하나 읽어본다.


[작품 저작 계약서]


소강자 성명: 지 해주(890622)

저작자의 표시 성명 : 장 욱(930309)

이명(필명) : 장 욱

저작물의 표시 제호(가제) : 꽃과 바람과 향기


제1 조항

작가 장 욱은 시나리오 완성, 스케치 완성 등 작품 창작의 각 단계마다 대표 지 해주에게 제작한 작품의 검수를 요구할 수 있다.

작가 장 욱은 작품 검수 후, 수정 사항이 없을 때에 각 단계별 검수를 확인 완료 한다는 사인과 함께 완료 날짜를 표기해야 하며,

작가 장 욱과 대표 지 해주가 상호 협의한 완료일 2023년 05월 31일까지 작가 장 욱에게 교부해야 한다.


제2 조항

작가 장 욱은 해당 저작물에 대한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포함한 저작재산권 일체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며,

대표 지 해수는 소강자로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제3 조항

작가 장 욱은 최종 발주 후, 2023년 05월 31일까지 대상 저작물의 영화 제작을 위하여 필요한 완전한 원고를 대표 지 해주에게 인도하여야 한다.

단, 상호 합의에 따라 인도 시점을 포함한 계약 조건을 변경하거나, 이에 준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작가 장 욱의 서면동의를 얻은 후,

인도 시한을 변경할 경우는 예외로 정한다.


제4 조항

작가 장 욱이 최종 발주 완료일인 2023년 05월 31일까지 대상 저작물의 완전한 원고를 인도할 시 영화 제작에 대한 모든 대금과

계약금(금 1억 원-부가세별도)을 2023년 06월 31일까지 작가 장 욱 명의의 통장으로 지급한다.

단, 대표 지 해수와 합의 없이 최종 발주 완료일까지 완전한 원고를 대표 지 해주에게 인도하지 못할 경우, 작가 장 욱에게

별도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으나 작가 장 욱의 귀책사유로 위반할 경우에는 손해배상금을 계약금으로 대체하여 반환한다.


제5 조항

작가 장 욱은 최종 발주 완료일까지 자신의 몸과 영혼을 대표 지 해주에게 귀속하며,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한다.

이를 어길 시 대표 지 해주에 의해 소멸될 수 있다.

제6 조항

대표 지 해주는 작가 장 욱이 최종 발주 완료일까지 완전한 원고를 인도할 수 있도록 작가 장 욱이 원하는 것은 모든 협조하도록 한다.


대표 지 해주와 작가 장 욱은 위 조항과 같이 계약이 성립되었으므로 계약서 2통을 작성하고, 대표 지 해주와 작가 장 욱은 각 1통을 보관한다.


2023년 01월 31일


소장자 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성명: (주)블루문

대표이사 지 해수 (인)

저작자 주소: 서울시 광진구 화양동

성명: (주) HS필름

소속 작가 장 욱 (인)


"이거 뭔가 불공정 계약 같으면서도 아닌 거 같은..."


"5월 31일까지 원고만 넘기면 계약금부터 영화 제작, 그리고 그 이후 작가로서의 활동에 있어서 꽃길이 펼쳐질 텐데 과연 불공정 계약일까?

아닌 거 같으면 사인 안 해도 돼. 대신, 이 계약을 거부하면 난 너의 생사에 관여할 수 없다. 내가 널 살릴 수도, 지킬 수도 없게 되지.

지금처럼 살지, 말지는 네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거다. 내가 널 구한 순간에 갑자기 살고 싶어진 건 아닐 거라는 거 알아.

그냥 버텨. 이렇게라도 버텨. 내가 버틸 수 있게 해줄게."


욱은 진심 어린 해주의 말에 만년필을 꼭 쥐고는 눈물을 흘린다.


"또? 하...우는 것도 습관 돼. 미래를 위해 참는 연습도 좀 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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