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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by 제나랑

<2024년 07월 13일>

스텔라는 루틴처럼 오전 10시쯤 일어나 드립커피를 내려 마시고,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1층의 큰 창 너머로 보이는 야외 정원과 파란 하늘을 보며


배고픔도 잊은 채, 시나리오 작업을 하다가 보니, 창밖이 어두워지면서 메이든의 톡을 받고 나서야 뻐근해진 어깨와 허리를 펴고 스트레칭을 한다.

그리고는 메이든과의 저녁 식사를 위해 외출 준비를 한다.

같은 시각, 메이든도 옷장에 꺼내둔 옷들을 전신 거울 앞에 하나씩 매치해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침대 위는 이미 그가 매치했던 옷들로 가득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2인실을 이용하고 있는 그는 매주 룸메이트가 바뀌다가 지금은 혼자 쓰고 있다.

집 안 구석구석 청소하던 주인아주머니가 살짝 열려 있는 메이든의 방문을 열며, 옷을 고르고 있는 그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관심을 보인다.

"데이트?"

"제 바람은 그런데, 그분도 그럴지는 모르겠어요~"

"너무 부담스럽게 다가가려고만 하지 말고, 진득하게 지켜보기도 하고 그래~"

"아방이 어멍한테 그랬던 거처럼?ㅎ"

"아방보다는 더 해야지~ 연애할 때 답답해서 도망갈라 그랬어~ㅎㅎ"

"그때도 아방 말수가 적었어요?"

"적기만 했나~ 재미도 없었지~ㅎㅎ"

"아 ㅎㅎㅎ"

주인아주머니는 메이든이 들고 있는 옷들을 보더니 고갯짓을 한다.

"젊어서 뭘 입어도 예쁜데 뭘 그리 고민해~ 그렇게 입으면 되겠네~"

"이렇게요? 이렇게 입고 나갔는데 그분이 싫어하면 어멍이 책임지셔야 되요~"

"뭘 어떻게 책임질꼬~ 우리 딸들은 다 시집갔는데~ㅎ"

"ㅎㅎㅎ"

주인아주머니도 웃으며 주방으로 향하고, 메이든은 들고 있던 옷을 입기로 하고 소파에 걸쳐 둔다.

그는 눈썹도 다듬고, 왁스도 바르고, 향수도 뿌려가며 한껏 꾸미고 나온다.

소파에 걸쳐 둔 흰 셔츠와 연 청바지를 입고, 다시 거울을 보면서 외모 점검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스텔라와의 첫 만남부터 올레길을 걷던 순간들까지 떠올려 보는 메이든

첫 만남이었던 카페 [맨도롱]에서는 평소 소설책 읽는 걸 좋아하는 그가 아는 작가를 만났다는 것 자체로도 신기하고 호기심이 느껴졌는데,


대화를 나누며 점점 경계심을 풀던 스텔라가 처음 그에게 웃어 보였을 때, 그녀의 양 볼에 깊게 팬 보조개가 너무 예뻤고 마치 작은 호수 같아서 빠질 것 같았다.

요트 투어와 그녀의 생일 홈파티, 그리고 올레길을 걸으며 깊은 대화를 많이 나눈 두 사람

그 대화들로 인해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고, 그녀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열정과 일에 대한 자세, 그리고 더욱 빛나 보이던


그녀의 웃음소리마저 그에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가 제주에 있는 날들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함께 하고픈 마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모든 순간이 즐거웠기에, 그녀와의 대화 또한 그에게 더욱 의미가 있었다.

스텔라도 그의 친절한 태도와 배려심,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말투에 점점 끌렸고, 그녀의 마음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는 건 충분히 느껴졌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도 아직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행여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이게 된다.

주인아주머니의 말처럼 진득하게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녀가 제주에 온 이유가 슬럼프 때문이라고 하니, 그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게 옆에서 응원해주고 싶고,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호감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 그리고 깊은 유대감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외출 준비를 마치는 대로 급히 게스트 하우스를 나섰다.

두 사람의 숙소에서는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크랩ㅍㅌㅇ]으로 이동하는 데에 앞서, 카페 [맨도롱] 앞에서 만나 메이든의 바이크를 타고 가기로 했고,


메이든은 게스트 하우스 정문 앞 주차장에 주차해둔 Y MT03 바이크를 몰아, 카페 [맨도롱] 앞에 도착한다.

PM 07:30

잠시 후, 펜션을 나와 카페 쪽으로 걸어오는 스텔라가 보이고, 바이크에서 내리지 않고 헬멧만 벗은 채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메이슨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바이크 시트를 열어, 안에 있던 여분의 흰색 헬멧을 꺼내 그녀에게 씌워주고는 뒤에 타기 쉽도록 앞으로 당겨서 앉는다.

메이슨의 바이크 뒤 시트에 올라타는 스텔라

"엔진이 많이 뜨거우니까 안 닿게 조심해요~"

"알겠어~"

안정감 있는 라이딩으로 해안 도로를 달리자, 온몸을 스치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진다.

해안 도로 오른쪽으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메이든의 허리를 감싼 그녀의 손길에 그는 잔뜩 긴장한 채로 라이딩했고,


생각보다 빨리 [크랩ㅍㅌㅇ]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매장 옆 주차장에 바이크를 주차하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역시나 밤바다를 보기 위해 창가에 자리를 잡았고, 킹크랩과 랍스타가 싱싱하고, 먹기 좋게 손질까지 해주는 코스요리로 유명한 [크랩ㅍㅌㅇ]라서


킹크랩과 랍스터 세트 코스로 주문했으며, 매장 내부는 좌식 테이블은 3개, 홀 테이블은 3개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 넓지는 않다.

요리되는 동안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면 좋겠지만 바이크를 가져온 메이든은 마실 수 없기에 스텔라도 술은 패스하기로 했고, 잠시 후,


코스 요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한다.

메뉴가 킹크랩 코스, 랍스터 코스, 그리고 킹크랩과 랍스터 세트 코스, 세 가지 뿐이라 그런지, 코스 요리는 제철에 맞는 재료로 계절마다 종류가


조금씩 바뀐다는 점만 봐도 신경을 쓴 티가 많이 나는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으며, 하나도 질기지 않았던 문어숙회, 깊은 맛의 전복죽, 날치알이 올라간


전복버터구이, 꽃게도 아닌 랍스터 다리가 들어간 된장찌개만으로도 너무 맛있어서 두 사람 모두 빠르게 접시를 비워냈다.

킹크랩보다 랍스터가 먼저 나오고, 직원이 킹크랩을 먹기 좋게 전부 손질해서 따로 큰 접시에 담고는 이어서 랍스터도 서빙해준다.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의 싱싱한 킹크랩과 랍스터도 좋았지만, 후각, 시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을 만족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킹크랩 딱지 볶음밥까지 빠질 수 없는 메뉴라 이미 배가 터질 것 같았음에도 손은 이미 숟가락을 들고 있었고,


결국 빈 딱지가 되도록 긁어 먹은 두 사람

식사를 마치고 매장을 나온 두 사람은 다시 바이크를 타고 카페 [맨도롱] 앞에 도착했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커피 한잔을 하기로 하고 카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젠 카페 사장님도 두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반갑게 맞이한다.

두 사람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킨 후, 창가 자리에 앉는다.

"메이든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모르겠어요~ 원래는 6월 22에 처음 와서 일주일만 있다 가려고 했는데, 벌써 7월이 됐어요."

"휴가가 언제까진데?"

"8월 4일까지요~ 작가님은 이달 말까지 계실 거죠?"

"일단 비행기표 예약은 이달 말일인데, 그전까지 시나리오 완성이 안 되면 취소하고 더 연장하려고~"

"나중에 여기 집 산다고 하시는 거 아니에요?ㅎㅎ"

"그럴까 봐~ㅋㅋ"

"집 지을 때 연락 주세요~ 잘 해드릴게요~ㅎㅎ"

"농담 아닌 거 같은데? ㅋㅋ"

"반반?ㅎㅎ"

그때, 카페 사장님이 마들렌과 쿠키를 가져다준다.

"파는 건 아니고~ 제가 베이킹이 취미라서 집에서 구운 건데 좀 드셔보세요~"

"아, 감사해요~ 와~ 냄새 진짜 좋은데요?"

두 사람은 한 입씩 맛을 본다.

"오~ 둘 다 맛있는데요? 베이킹 진짜 어렵다던데~"

"맞아요~ 진짜 어렵긴 한데~ 재밌어서 계속 하나 보니 먹을 만은 하더라구요~"

"아우~ 너무 겸손하시네~"

"하하~ 커피랑 맛있게 드세요~"

"감사해요~"

두 사람은 아메리카노와 잘 어울리는 마들렌과 쿠키를 먹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메이든은 고민 없어?"

"고민이요? 흠..제가 생각을 오래 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근데, 제주 오기 전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전에 성공했던 디자인을 돌려쓰기도 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창작하는 것보다는 안전한 방법으로만 진행 하려고 하다 보니, 점점 도태되는 것 같고, 발전이 없는 거 같아서, 이게 번아웃인지,


슬럼프인지..같은 업계 사람들은 당연한 과정이다, 나도 그랬다, 다 지나갈 거다, 라고 말해 주는데 전혀 위로가 안 됐죠..

그래서 작가님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닌데 실질적으로 위로가 전혀 안 되긴 하지~ 사실 맞는 말로 해결해 달라고 털어 놓는 게 아니잖아~ 맞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이번 슬럼프가 두 번짼데, 10년 전에 처음 슬럼프가 왔을 때는 심각한 수준은 아니어서 계속해서 다른 사람 영화도 보고, 소설책도 읽어보고, 내가 썼던 작품들


다시 꺼내서 또 읽어보고 하다 보니 극복이 됐거든.


근데 이번 슬럼프는 4년이 넘도록 극복이 안 되는 거야~ 처음 슬럼프 왔을 때 썼던 방법들은 당연히 다 해봤고, 나랑 같이 일하는 팀이 있는데, 팀원들이랑도


여러 번 미팅했었는데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안 나오더라고~ 다 어디서 본 거 같은 스토리고, 짜집기 한 거 같고..

그래서 이거는 정신적인 문제, 심적인 문제로부터 해결이 돼야 극복이 되겠구나..정신과 상담도 좋고, 약물 치료도 좋은데, 일단 휴식다운 휴식으로 마음을


일단 정화해 보자, 해서 일단 어디론가 떠나서 한 달 살기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고, 한라산 때문에 제주를 선택해서 왔지.


제주의 하늘, 노을, 바다, 이런 것들이 다르긴 다른가 봐~ 절경들을 보러 다니다 보니, 수요일부터 쓰기 시작한 거 같아~ 그걸 극복했다고 하면 극복한 거고,


아니라면 아니지만, 슬럼프를 극복한다는 게 거창하지만은 않은 거라고 생각해~ 아무리 4년 동안 못 쓰던 시나리오도 제주도 바다 한 번 보고


쓰기 시작할 수도 있는 거고, 이러다 다 엎어 버리고 또 다른 4년이 지나도록 작품이 안 나올 수도 있는 건데, 그 와중에도 단순하게 그저 끊임없이


쓰고 또 쓰는 방법밖에는 없더라고~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게 아니더라고~ 글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마찬가지 아닐까? 별로여도 좋고, 카피도 좋고,


했던 디자인을 디벨롭 시켜도 좋으니까 그냥 생각 없이 계속 디자인 하고 또 하고~"

"아~ 괜찮은 디자인이 나올 때까지 그냥 계속해서 생각 없이 해본 적은 없네요, 그러고 보니까~ 하고 또 해보다 보면 별로인 디자인이 나와도


디벨롭 시켜볼 수도 있는 거고, 카피해서 디벨롭 시켜 보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더 괜찮은 디자인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해보고 별로면 포기하고,


그냥 예전 디자인 가져오고, 그게 계속 반복이었던 거 같아요~ 해보지도 않고 번아웃이니, 슬럼프니, 우는소리만 했네요~"

"그럴 수 있지~ 다들 처음 사는 인생인데...인생 2회차, N 회차, 이러지만, 그렇다고 한들 완벽한 인생이 어딨겠어~


다들 그렇게 부족한 거 채워가고 배워가면서 사는 거지~"

메이든은 스텔라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는지 뭔가 다부진 결심을 한 표정이다.

그렇게 카페에서도 진솔한 대화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각자의 숙소로 헤어졌다.

펜션으로 돌아온 스텔라는 바로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작업하던 시나리오를 마저 써 내려간다.

담담하게 고민을 털어놓는 메이든의 말을 귀담아듣고, 그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그런 기댐 없이 그저 자신이 30대 했던 고민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 듣고 싶었던 말들을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야기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도 위로가 되었던 듯하다.

그 뒤로도 1층 거실, 2층 침대 등 자리를 옮겨가며 시나리오 작업을 이어갔고, 새벽이 되어서야 다른 침대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는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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