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sweet home
10시간 가까이 비행하는 동안 익숙한 듯 못 잤던 잠을 몰아서 자고, 책도 읽도, 영화도 보는 이환과 해주와는 다르게
두리번거리며 기내를 둘러보거나 좌석의 기능들을 탐색하거나 기내식 하나에도 신기해하는 욱
"거 참. 되게 시끄럽네."
"아, 죄송해요."
다시 잠을 청했다가 욱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해주는 스튜어디스에게 위스키 언더락을 요청한다.
위스키를 마시고 다시 또 잠을 청한 해주는 착륙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수십 번 뒤척이고 깨고를 반복한다.
욱 때문이 아니어도 해주는 비행기에서까지 쉽게 잠에 들지 못하고 늘 피곤함에, 출국하거나 귀국한 날은 호텔에 출근하지 못하고 쉬곤 한다.
어느덧 착륙을 완료하여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고 게이트로 나오자 양부모님이 4절지를 들고 해주를 반긴다.
[보고시퍼써 해주~] 한글로 삐뚤빼뚤 쓰인 환영 문구에, 빵 터진 해주는 양부모에게 달려가 폭 안긴다.
이제껏 볼 수 없던 해맑은 해주의 모습에 당황한 욱
해주는 며칠 전 양아버지와 통화할 때 욱에 대해 미리 말해놔서 양부모님은 욱에게 먼저 다가와서 인사한다.
욱은 어색한 듯 쭈뼛대지만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양부모의 차를 타고 함께 본가로 향하고 30분쯤 이동하니 본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양아버지가 차려주는 집밥을 먹고 내일 일정을 위해 일찍 2층 방으로 들어온 해주
양아버지는 해주의 방을 해주의 성장 과정이 잘 볼 수 있도록 나이대별로 사진 액자가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고
진열장에도 해주가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트로피들과 승마와 골프 대회에서 받은 상 그리고 표창장까지 먼지 한 톨 없이 진열되어 있다.
양부모님이 해주를 마음으로 낳아서 얼마나 사랑으로 키웠는지 알 수 있다.
피곤했는지 씻자마자 침대에 누운 해주
본가는 해주가 유일하게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든다.
욱은 해주의 양아버지에게 안내받은 1층 게스트룸에서 짐을 풀고 잘 준비를 하지만 설레는 마음에 쉽게 잠에 들지 못하고
핸드폰에 이것저것 메모를 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든다.
이환이 해주와 본가를 자주 오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올 때마다 해주의 양부모님은 흔쾌히 1층에 또 다른 게스트룸을 내어주셔서 편히 지낼 수 있게 해 주신다.
양부모님은 해주와 수다 떨면서 술 한 잔 하고 싶지만 피곤해 보였던 해주를 위해 하루 정도는 더 참아본다.
본가에서 독립하여 바로 옆 빌리지 안에 있는 집에 살고 있는 해주의 10살 많은 오빠 Tayler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어서
내일 저녁에 방문할 예정인데 남매간에 우애도 돈독해서 비행기에서 탑승하고 내릴 때 이미 통화를 마쳤다.
해주는 대학 졸업 이후 양부모님에게서 독립하여 한국으로 넘어온 가장 큰 이유가 악마로써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늘 가족에게 자신이 악마고, 44살이 되면 그들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 만으로 괴로웠으며,
과연 악마인 자신이 이렇게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아도 되는가에 대해 항상 딜레마와 자괴감 속에서 힘들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해주로서의 삶이 다 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신'에게 자문을 구하고자 몇 번이고 찾아갔지만 항상 '신'은 악마의 숙명이라는 말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늘 그렇듯 '신'은 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힌트만 던져줄 뿐이다.
그 힌트 속에 답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아니면 아예 깨닫지 못하고 소멸하게 될지, 그 또한 해주에게 달린 숙명이니...
아직 악마 1회 차인 해주는 그 숙명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다.
다만, 1회 차에 이 역의 환생을 만났으니 2회 차로 넘어가기 전에 이 역의 기억을 되돌려 채경이 궁에서 쫓겨난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냄과 동시에 '신'이 소환할 때까지 임무를 잘 수행하여 다시 이 역을 재회했을 때
어떤 감정으로 이 역을 마주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감정으로 마주해야 하는지가 왜 중요하냐, 재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채경이 궁에서 쫓겨나고
이 역의 임종 직전까지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만 하다 몇 십 년을 허망하게 보낸 것이 환생한 이후에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펑펑 눈물을 쏟아낼 정도로 사무쳤다.
그러니 반드시 1회 차가 끝나기 전에 모든 걸 알아내야 한다.
2회 차로 넘어간 이후에는 다시 이 역의 환생을 만날 수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