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악마도 누군가에겐 희망이 된다

by 제나랑


[다음날]


욱은 일어나는 대로 해주를 찾았다.

해주는 양부모님과 드립 커피를 마시며 대화 중이다.

방에서 나오는 욱을 발견한 양부모님은 브런치로 스크램블 에그와 바짝 구운 베이컨 그리고 구운 식빵을 준비해 주고,

양부모님은 평소처럼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산책하러 집을 나선다.

욱은 해주에게 꿈 얘기를 하는데 중종과 채경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아무래도 네가 다락방을 간 이후로 이 역의 기억이 꿈을 통해서 너에게 주입되고 있는 거 같은데...시간 순서는 중구난방이네...

저잣거리는 혼인한 지 얼마 안 됐을 때고, 자결하려 한 건 궁에서 쫓겨나기 직전이니까."


"그럼 진짜 제 전생이 중종..이 역이라구요?"


"이제야 믿는 구만. 한강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도 다른 영혼과는 달리 악마의 카페로 소환되지 않고 내가 네가 있는 한강으로 소환되는 것부터

똑같이 생긴 얼굴에, 다락방 문까지 누가 봐도, 지나가던 고양이가 슬쩍 봐도 네가 이 역의 전생인데 본인만 안 믿었어."


"아...ㅎㅎ"


"시나리오는 어떻게 돼 가?"


"어기 와서 좀 썼어요."


"그래? 중간보고 가능하겠어?"


"음...이번 달 말일? 정도면 가능할 거 같아요."


"그럼 1월 31일에 중간 검수 합시다, 작가님."


"네, 대표님. 그럼 말 나온 김에 전 작업하러 들어갈게요."


"네~"


욱이 방으로 들어가고 해주는 드립 커피를 한 잔 더 내려서 테라스로 나가서 테이블 위에 머그잔을 올려놓고 라탄으로 된 1인용 소파에 앉아 태블릿 PC를 본다.

산책 후 돌아온 양부모님도 방으로 들어가고 이미 해주보다도 더 일찍 일어난 이환은 조깅을 마치고 들어온다.


"정 실장님, 식탁에 브런치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이환이 브런치를 먹은 후 뒷정리까지 하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씻고 나와서 드립 커피를 내린 후 얼음을 가득 채운 텀블러에 옮겨 담은 후 해주 옆에 앉는다.


"대표님, 예지 씨 피부과 치료, 정신과 상담 잘 받고 복귀해서 진단서는 법무팀에 직접 제출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직 안 괜찮을 텐데...귀국하면 출근하는 대로 예지 씨 내 방으로 오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사 허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럼 인테리어 업체랑 미팅 잡아요."


"네. 알겠습니다."


해주는 머그잔을 들어 드립 커피를 마시는데 움직일 때마다 통증을 호소하고 모든 움직임이 조심해진다.


"드레싱 하셨습니까? 제가 해드릴까요?"


"아뇨. 일어나서 제가 했어요."


"진통제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네. 아까 브런치 먹고 깜박했네요."


이환은 해주의 방에서 진통제를 가지고 주방으로 가서 물과 함께 가져온다.

해주가 진통제와 물을 받는다.


"근데 진통제 드시면 카페인..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환의 말에 멈칫한다.

해주는 악마의 카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커피가 없으면 하루가 우울할 정도로 커피를 좋아한다.


"그냥 참으까?"


"아니, 대표님. 힐링 능력도 없으시면서 아픈 건 나으셔야죠. 커피는 그 이후에 드셔도 되잖아요."


해주는 머그잔에 든 드립 커피에 시선을 둔다.


"...이것만 다 마시고 진통제 먹을게요. 안 먹겠다는 거 아니잖아."


"하...맘대로 하세요."


해주는 씨익 웃으며 물과 진통제를 테이블 위에 슬며시 내려놓고 머그잔을 소중히 손에 쥐고 드립 커피를 홀짝대며 마신다.


(이 여자를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이럴 때 보면 악마가 맞나 싶고,

이런 모습이 단경왕후 신채경인가 싶고,

악마의 일을 할 때는 또 다른 사람 같은데 그게 본모습인지,

이런 모습이 본모습인 건지 알 수가 없다.

난 지금 이런 모습이 왜 진짜 이 여자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아무래도 신채경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늙어가지만 이 여자가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혹은 내가 죽을 때까지 이 여자를 보필하기로 했다.

계기가 있다면 고등학교 때부터 알바와 학업에 시달리던 때에 지해주와 만난 적이 있다.

아마 지해주는 그때를 기억 못 하는 듯 하지만 난 그때 깡소주를 마시며 편의점 앞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지나가던 지해주가 그런 나를 보더니 편의점에 들어가 휴지를 사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후 지해수가 호텔리어로 일하는 영상이 호텔 광고로 나오는 걸 보게 되었고

알바를 구하다가 그 호텔 공고도 보게 되었다.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았고 그냥 그 호텔 면접을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운동을 좋아하고 복싱을 하고 있어서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 최종 합격하였고 경호팀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렇게 호텔리어와 시큐리티로 처음 만났고 조금씩 안면을 트고 친해졌다.

그때까지도 난 지해수가 그 호텔 사장의 입양된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지해수가 새로 짓는 자기 호텔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내 삶은 점차 결핍에서 벗어나 조금씩 행복이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지해수가 악마라는 사실을 나에게 들킨 날, '신'과 계약을 했다.

원칙상 난 소멸되거나 기억이 없어질 뻔했으나 입 다물고 곁에서

보필하는 조건으로 소멸이나 기억 상실을 면하기로...

처음엔 그 계약 때문에 보필하는 것이 그냥 하나의 임무라고 생각했지만

계속 지해수 옆에서 지켜보면서 악마와는 별개로 마치 내가 이 여자를 보필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 인해 잃은 건 내 개인적인 시간 정도? 그것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배려해주고 있고

그보다 받은 것, 얻은 것이 더 많기에 다른 일을 하거나 계약 만료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희망은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고문이다.

누군가에게 악마는 악독하고 잔인한 존재지만 또 누군가에겐 악마는 희망의 빛 한 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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