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24화

by 제나랑

23화 - 전생 vs 악마 vs 인간


저녁 식사 후 해주의 양아버지는 해주, 이환, 욱 세 사람을 거실로 불러 모으고 양어머니는 해주의 방에서 앨범 3개를 가져오자 해주가 격하게 반응한다.


"(영어) 엄마! 그런 건 우리끼리 봐요~~아, 진짜!"


"(영어) 왜~ 귀엽잖아~ 이런 건 여럿이 볼 수록 좋아~ 내가 얼마나 열심히 찍고 열심히 정리했는지 아니?"


해주는 더 이상 반발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쉰다.


앨범 중 가장 두꺼운 건 해주가 입양한 직후부터 9살 때까지, 중간 두께의 앨범은 10살부터 19살 때까지, 가장 얇은 건 20살 때부터 29살 때까지의 사진들이

정리되어 있고 각 사진마다 양어머니의 코멘트가 적혀 있다.


"(영어) 30살부터 있는 건 가장 최근 거라 해주가 진짜 싫어할 거 같아서 양심상 안 가져왔어~"


"(영어) 차라리 이거 3개보다 그거 1개 가져오는 게 나을 뻔했어요~ 반대로 하셔 맨날~으이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해주의 성장기를 듣고 있는데 이환이 양부모님과 해주에게 질문을 한다.


"(영어) 세 분 각자 가장 좋아하는 사진 있어요?"


먼저 양아버지는 고민 하나 없이 입양 직후 집 앞에서 찍은 사진과 대학 입학 하던 날 대학교 심볼 앞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작은 호텔을

설립하던 날 호텔 앞에서 찍은 사진, 이렇게 세 장을 선택했다.

주로 해주가 홀로서기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좋아하는 양아버지


양어머니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 장은 동일하게 입양 직후 사진이었고, 다른 한 장은 7살 때 처음으로 '엄마'라고 하면서 양팔 벌려 안아달라고 하는 사진이고,

또 다른 한 장은 대학 졸업 후 처음 독립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던 날 공항에서 찍은 사진, 이렇게 세 장을 선택했다.

그중 처음으로 '엄마'라고 했을 때는 울컥해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해주는 가장 오랫동안 고개를 갸우뚱대며 생각하더니 한 장은 역시나 입양 직후 사진, 다른 한 장은 대학 입학 하던 날 기숙사 앞에서 찍은 사진이고,

또 다른 한 장은 지금의 [블루문]을 개업하던 날 호텔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선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애 사진은 입양 직후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인데 또다시 버려져 보육원으로 돌아갈까 봐 두렵기도 했지만 따뜻하고 다정한 새 가족들과

살게 될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그저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지해주만 보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홀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중에 하나가 '나'라는 존재였다.

전생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내가 이번 생에도

여전히 신채경의 영혼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고로 신채경이

지해수고, 지해수가 신채경인지, 아니면 별개의 존재로서 다른 성격을 띤 존재인지,

아니면 환생하면서 악마로서의 성격이 진짜 나의 모습인지...

그래서 지금까지 신채경의 생일 2월 16일과 지해수의 생일 6월 22일,

이렇게 두 번의 생일을 챙겨 왔다.

536년간 살면서 그중 인간으로 34년을 살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깨달은 건 전생이든,

악마든, 지해수든 구분 지을 필요 없이 모두가 그냥 '나'라는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인간들의 인생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인간들이 이름은 하나지만

상대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살아간다.

직장에서의 나, 부모에게 자식으로서의 나, 친구에게 친구로서의 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인으로서의 나...

아마 이 모습들이 전부 동일한 성격을 가진 인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두가 '나'라고 받아들이면 편해진다.

직장에서의 '나'도 '나'고, 부모에게 자식으로서의 '나'도 '나'고,

친구에게 친구로서의 '나'도 '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인으로서의 '나'도 '나'인 것이다.

그냥 다 '나'인 것이지 굳이 별개로 생각할 필요가 애초부터 없던 것이다.

그러니 신채경도 '나'고, 악마도 '나'고, 지해수도 '나'다.)


해주는 부끄러움이 몰려와 앨범 하나하나 걷어서 빠르게 방으로 가져간다.

그 와중에 욱은 빠르게 계단을 오르는 해주를 보면서 아무리 능력이 제한되었어도 인간에 비해 회복력이 빨라서 이제는 괜찮나 보다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이환도 내일은 실밥 뽑으러 병원 내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주는 앨범이 꽂혀있던 책장에 다시 꽂아놓고 방을 나서기 전에 상처 부위를 거울을 통해 살펴보는데 어제보다 훨씬 아물어 있었다.


밤은 더 깊어가고 모두가 각자 잘 준비를 하는데 평소와는 달리 가정 먼저 잠에 든 해주가 항상 꾸던 악몽을 다시 꾸고 있다.


[해주의 악몽 속]


이번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수심의 물속에 빠졌고 점점 가라앉으면서 주변도 어두워져 곧 칠흑 같은 어둠이 닥쳤다.

물 속이라는 두려움과 어둠 속에, 공포심이 극대화되었다.


이윽고 유유히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갑자기 괴물과 악귀들로 모습이 변하면서 해주를 공격했고, 해주는 부력으로 인해 악마의 검으로는 싸우기 힘들어지자

악마의 활을 이용해 싸운다.

계속해서 가라앉다가 차원의 경계선 문과 똑같이 생긴 문이 나오고 그 문을 힘주어 열자 역시나 축제가 한창인 조선 시대의 저잣거리가 눈앞에 펼쳐지고

채경이 자주 입던 붉은색의 치마와 남색 저고리를 입은 해주 옆에는 한 남자가 선비 복장을 하고 서 있다.


이번에는 다른 악몽과는 달리 그 남자는 이 역의 목소리를 하고 채경의 이름을 불렀고 채경이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이 역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 역의 얼굴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악몽 속, 그의 얼굴은 악몽과는 달리 환하게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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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 악마의 최선


짧은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가고 해주, 이환, 욱 세 사람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긴 비행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욱은 약속했던 [꽃과 바람과 향기]원고 중간 보고를 위해 시나리오 작업 하는데에 박차를 가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식사도 간단히 떼워가며 하얗게 불태우고 있다.

다음날이 밝아오도록 작업을 하다가 아침이 돼서야 쪽잠을 청한다.


해주가 출근을 하고 이환이 해주가 지시한대로 예지를 데려온다.

이환이 해주의 사무실 노크를 한다.


"대표님, 예지씨 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사무실 문을 열고 예지가 들어온다.


"몸은 좀 괜찮아요? 상처는?"


"덕분에 치료 잘 받아서 흉터는 안 남을 거 같아요. 근데 그 새..아니, 그 인간 다시 올 거 같아서 무서운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보자고 했어요. 호텔리어 일은 잘 맞아요? 다른 파트 일을 해보는게 어때요?"


"호텔리어 일이 다른 건 다 좋은데 주폭 손님 상대하는게...제일 힘들었어요. 다른 파트 일이라면 어떤 업무 일까요?"


"나도 호텔리어로 일한 적 있어서 잘 알아요. 일단 관리부서에 인사팀에서 일 해볼래요?"


"인사팀이요? 아, 네! 해보겠습니다! 언제부터 옮기면 될까요?"


"지금요."


"지금요? 갑자기요?"


"왜요? 그 새끼가 언제 또 올지 무섭다면서요. 물론 경비 시스템 강화해서 경호팀 선에서 그 새끼 제재할 수 있도록 할 거지만

그렇다고 안심이 되진 않을 거 아니에요."


"아, 그쵸...그럼, 바로 짐 챙겨서 이동하겠습니다."


"그래요. 자세한 건 정 실장님이랑 인사팀 팀장님이 안내 해줄 거에요. 나가봐요."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예지가 사무실을 나가고 해주는 악마의 카페로 향한다.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고 있는 욱을 발견하고 책상 앞에 멈춰선다.


(뭐야, 밤까지 샌 거야? 어제 하루 정도는 쉬지.

누가 보면 협박 당하는 줄 알겠네.

설..마...나 이 인간 걱정 하는 거?

미친...정신차려, 이 인간이 이 역은 아니라고...)


욱은 피곤한 듯 한껏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가 앞에서 서있는 해주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다.


"아~! 아, 깜짝이야~ 뭐..뭐하세요?"


"악마랑 동행하는 인간이 새삼 뭘 놀래고 그래~ 간이 콩알만 하군. 작업만 할게 아니라 간도 좀 키워야겠네."


"아니, 간이 콩알만 하다니요. 인기척도 없이 서 계신데 어떤 인간이 안 놀래요. 간 키우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정 실장은 안 놀래던데..."


"그 덩치에 놀라면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덩치랑 간 크기랑 무슨 상관이야. 덩치는 너도 만만치 않아."


"아, 맞네. 아무튼, 왜, 왜요? 영혼 계약..뭐..그거 하러 오셨어요?"


"아니, 오늘은 진열장 정리 좀 하려고."


"아..."


해주는 자개함을 가져오더니 머그잔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 벽장 중 가장 안 쪽에 있는 벽장 앞으로 걸어가

그 벽장에 있는 모든 머그잔을 염력을 이용해 자개함 안에 넣는다.

자개함은 해주의 팔 길이 정도 되는 크기의 상자지만 그 많은 머그잔이 줄줄이 들어가고 모든 머그잔을 전부 벽장 한 칸씩 옮겨 비어 있던 벽장을 채우자

아치월 양 옆에 있는 벽장이 비워진다.


이를 넋놓고 바라보던 욱은 다시 시나리오 작업을 하려고 하지만 새벽까지 하얗게 불태웠더니 막혀서 작업이 이어지지가 않는다.

머리를 쥐어 짜고 있는 욱을 보고 해주는 피식 웃는다.


"왜, 막혔어?"


"저는 진짜 재능이 없는 거 같아요. 철저히 노력형 작가인가봐요. 이렇게 막히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다시 쓰기 까지 너무 힘들어요."


"재능이 별거야? 그냥 자신을 믿는 것이 재능이지. 밤 샌 거 같은데 머리 좀 식혀~ 영화를 보든, 책을 보든, 산책을 하든 해.

그 다음에 다시 앉아서 일단 해~ 그러다 불 붙여서 활활 다 태워버려~ 그러고는 다 태우는 것이 결국 재능인 거지. 거창한 게 아니야.

그리고 너희 대표가 나한테 투가 제안 하러 올 정도면 재능 있는 거지. 너의 실력을 믿는 사람이 있잖아. 그럼 된 거지."


"그러네요. 감사해요. 매번 이렇게 위로에, 용기도 북돋아주시고..."


"가장 핵심인 살려준 건 왜 빼먹냐?"


"아, 그쵸. 그게 제일 감사해요. 고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같이 영화 보실래요? 이해영 감독님 영화 유령 개봉 했던데."


"그러지."


해주는 정 실장에게 전화를 건다.


"정 실장님, 영화관 예매 좀 부탁드려요. 정 실장님까지 3인."

-저는 괜찮습니다. 무슨 영화로 예매 할까요?

"유령 이요."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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