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기 힘든 시간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과 함께하는 집 밖의 점심시간은 계속된다. 여름 나기가 힘든 아버지는 딸을 보자마자 너무 더워 아무런 의욕이 없다고 하신다. 삶의 의욕을 대신 불어넣어 드릴 길이 없음을 아는 딸은 우선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산다는 것, 그 이유와 의미를 찾아가는 젊은 날은 머나먼 인생의 끝에 대한 고민보다는 눈앞에 주어진 과제가 우선이다. 몇 주를 고생하던 아들이 프로젝트가 끝이 났다며 결과를 즐기기도 전에 다음 과제에 시동을 건다. 휴가 때 같이 시간을 보내려던 은근한 바람은 멀리 날아갔다. 휴가도 근무시간도 정해진 총량 안에 재량이다. 한 집에 살지만 얼굴 보기 힘들다. 달려야 할 목표가 분명한 청춘은 갈길이 바쁘다.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에 아들의 문자가 온다. '네~감사합니다. 읽어볼게요.' 별것 아닌 이 단정하고 예의 바른 문구에 갑자기 코끝이 찡해온다. 참고하라 문자로 보낸 기사에 대한 반응이다. 사실 아들의 이런 반응은 실제 우리 모자관계와는 별개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외동이다. 평소에 반말을 하고 적당히 무뚝뚝하며 대면대면하게 지낸다. 예전 같으면 본인의 가족이 있어야 할 성년이지만 아직 미혼이다. 여전히 나에게는 하나뿐인 자식이고 속내를 드러내진 못해도 마음은 애틋하다. 그럼에도 다가가기엔 너무 먼 다 큰 어른이다. 녀석은 언제나 단정한 문자를 보내 나를 당황하게 한다. 오늘은 문득 문자로 받은 존댓말이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주책없이 서럽다.
아버지를 여전히 아빠라 부르는 나는 나이 많은 외동딸이다. 손자손녀가 있어야 할 나이지만 여전히 부모님께는 젊디나 젊은 능력 있는 자식이고 즐거움의 원천이다. 그런 자식에게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모든 걸 내려놓고 의지하기 시작하셨다. 만나자마자 풀어놓는 일상의 고충에 안타까움이 한가득이다. 스스로를 환자라 칭하는 아버지는 통증보다 더한 마음의 병을 앓는 중이다. 병원은 벗어났지만 자유롭지 못하며 반듯한 외모에서 대수술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주변인의 반응이 힘들고 자신의 어려움을 몰라주는 사람들이 야속하기 그지없다. 젊은 사람도 지치는 더위에 아버지의 마음은 천근만근이다. 그래서 튀어나온 푸념이 가슴속에 박힌다.
모두가 어쩔 수 없는 나이 듦이라는 시간. 서로 주고받는 좋은 말들만큼이나 배려도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저 당사자가 져야 할 무게다. 마주 보고 식사하는 동안 아버지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웃어 보이는 것 말고는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 병상에서 일어나 휠체어에 앉고 직립보행이 되던 날 손뼉을 치던 시간은 저 멀리 가버렸다. 왼쪽뇌의 손상으로 청력과 후각이 상실된 아버지를 독려하는 방법은 이모티콘과 문자만이 서로가 주고받는 최선이다. 마이크가 찢어지는 듯한 귀속의 하울링을 어찌 상상할 것이며 머리 위에 아령이 올라가 앉은 듯한 무게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전화를 걸면 바로 나오는 메시지.'문자로 연락 주세요'
병마와 싸우며 노화라는 모진 시간을 견디는 삶의 어느 끝자락. 아버지가 보낸 문자에 평소와 같은 존댓말로 답장을 하려다 다시 바꾼다. '넹~아빠' 콧소리가 한껏 들어간듯한 답장을 하며 남은 시간 조금 더 버릇없어지기로 했다.
https://youtu.be/QCtEe-zsCtQ?si=quFAlHiyBY_I7XY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