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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우울한 고라니의 수기 (1)

단지 조금 우울할 뿐입니다.

by 희소

누구나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감정 없이 달리는 듯한 저 철마 또한 지친 표정으로 땀을 식히며 숨을 돌리는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저도, 누군가의 롤모델이자 위인들도 누구나 그런 힘들고 어두운 순간이 있습니다. 잠시 뻔한 소리지만, 언젠가 꼭 밝은 날이 찾아옵니다. 뜨고 지는 저 태양처럼 반드시 어둠 뒤에 빛으로 물드는 날이 당신에게도 옵니다. 밤 뒤엔 아침이 오니까요.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런 유의 말들이 정말이지 소름 끼치게 싫습니다. 실제로 제 팔 엔 닭살이 돋은 상태입니다. 밤 뒤에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대체 어느 멍청이가 모를까요? 6시 즈음이면 동쪽 하늘 어귀에서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둥그런 태양이 대가리를 쑥 내민다는 기본적인 과학 상식을, 삶이 힘든 이들은 몰랐던 걸까요? 아무튼 당신에게 아침이 올 테니 한사코 버텨라. 이미 마음 한 켠에서 사랑을 반 틈 잡아먹힌 자들은, 그런 보편적 진리나 자연에서 깨달음이나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순환은 또다시 아침 뒤에 밤을 부를 테고, 저는 어떤 경외심을 주는 태양 등의 자연과는 무관한 고작 한 마리의 동물이니까요. 저는 태양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제 삶은 하늘이 아닙니다. 제 머리가 제 눈앞의 상황을 완벽하게 인식해 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성장한 후부터, 제 마음엔 줄곧 새까만 밤뿐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저 여전히 새까만 밤, 그 밤에 먹는 조촐한 야식 정도였지요. 그런 미약한 빛들이 하나 둘 모인다고 해서, 아니, 더 나아가 그런 촛불이 백개가 이백 개 삼백 개 사백 개 오백 개가 된다고 해도 이 빌어먹을 골짜기는, 이 빌어먹을 집구석은 아침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깜깜합니다. 이 밤을 ‘아침이다 아침이다’ 생각하면 아침이라도 된답니까? 허허 참으로 속 편한 사고이십니다. 잠이 오지 않아 한껏 화를 내다보니 어느새 아침이 와버렸네요. 뒤바뀐 낮과 밤 때문에 엉망이 된 생활패턴은 요즘 제 가장 큰 고민이랍니다. 오늘 하루도 큰일 났군요.



사실 저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게 아닙니다. 저 산등성이를 네 번 넘어 보이는 마을이 제가 살던 곳인데요. 인간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고라니 사회는 요즘 출산율이 말이 아닙니다. 새끼도 낳지 않고 살다가 죽는 게 유행이래요 글쎄. 애를 낳고 애지중지 키워도 부모 자식 순서 없이 사고로 죽는다나 뭐라나, 아무튼 저는 유행에 뒤처졌나 봅니다. 대를 잇고 싶어서 동네마다 거리마다 샅샅이 뒤졌지만 이미 짝이 될 만한 이들 전부 혼인신고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아, 제가 외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이래 보여도 동네에서 두 번째로 혼인이 예정되어 있었던 몸이거든요. 다만 짝짓기를 하기 위해 자리를 살피던 도중 그만 인간들의 고철 마차에 제 신부가 변을 당해 유명을 달리했을 뿐입니다. 고통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보니 이미 주변의 친구들은 하나둘씩 장가며 시집이며, 제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자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짝을 찾고자 이곳저곳 헤매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아, 아침부터 시끄럽네요. 듣기 싫어도 이 시간만 되면 저 까투리의 뉴스가 자동으로 온 동네에 울려 퍼집니다. 잠에 들기는 글렀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제 풀에 꺾여 지칠 때까지 되풀이하곤 하죠. … 다만 오늘의 내용은 조금 충격적이네요. 산불이 났다고 합니다, 제가 원래 있던 곳에, 제 가족이 있는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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