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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우울한 고라니의 수기 (完)

단지 조금 우울한 고라니

by 희소

생각이 머리로 뻗치기도 전에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앞서 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하네요. 마치 뜨거운 무언가에 닿은 것처럼, 손이 먼저 움직이고 '앗 뜨거워'하며 인지를 하듯, 그렇게, 반사적으로, 저는 뛰고 있었습니다.

발을 잘못 디딘 건지 왼쪽 인대 쪽에 저릿한 통증이 지긋하게 느껴지는 것을 또 알아챘습니다. 10분 전에 둥그런 나무뿌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콱 밟아버려 이질적인 높이감에 놀랐던 순간이 스쳐 지나가네요. 혹은 그보다 전에, 경사진 바위면을 딛고 사선으로 뛰어오르다가 삐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내 발목이 다쳤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 사실 신경이 쓰이진 않습니다. 얼마나 더 이런 속도로 뛸 수 있을지가 걱정이네요.

잠시 허파가 저려옵니다. 가족들은 화마에 휩싸여 끔찍함조차 허용되지 않는 긴박한 감정으로 삶을 위해 분투하고 있을 텐데, 숨이 차다는 것만으로 고통스럽다며 걸음을 늦춘 제가 죄인으로 느껴지네요. 계속 이렇게 가빠진 호흡의 눈치를 봐가며 뛰었다 걸었다 반복하는 것보다는 아예 몇 분 정도 회복할 겸 걷다가 뛰는 게 장기적으로 유리할뿐더러 시간적으로도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가족이 살을 찢기는 고통에 허덕이고 있을 때 고작 그런 사소한 애로사항으로 달리기를 거부한 제 모습을 어떤 초월적 존재가 숨죽인 채 관음하고 있다면, 이 시점에서 번개나 낙석이나 어떤 수를 써서든 제게 천벌을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때문에 저는 과장하여 더욱 숨을 내쉬고 미간을 찌푸립니다. 하지만 발을 늦추진 않습니다. 이 정도의 처량함이라면 그 초월적 존재도 혀를 차기보다는 저를 응원해주지 않을까요?

제가 갈 방향에서 새들이 날아옵니다. 제 머리 위로 하늘을 쪼개며, 태양을 일순간 가리더니 제가 지나온 방향으로 새들이 날아갑니다. 특별한 일이라기보다는, 이 맘 때쯤 꼭 이곳을 배회하는 까마귀들이죠, 그들도 저를 보았을 겁니다. 스스로가 마치 위험한 현장에 솔선수범하여 나서는 소방관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기분이 한결 편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는 누구도 저를 쉽사리 욕할 수 없겠지요. 제 발을 강제로 처음과 같이 뛰게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 더욱 많은 존재들이 방금처럼 저를 지나쳐 갔으면 합니다.

여전히 숨은 차고,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가족들이 바보도 아닐 텐데,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리가 없다. 내가 지금 죽어라 뛴들 그들을 만날 수나 있을까? 내가 살던 집은 이미 망가졌을지도 모르고, 만에 하나 도착한다고 해도, 이렇게 숨이 차서야 남들보다 훨씬 많은 잿더미나 들이마 쉴 테고, 기진맥진한 내가 도움이나 될까? 오히려 짐이 되지는 않을까? 가족들은 대피했을 텐데, 나만 그 현장에서 죽어버린 채 발견되는 게 아닐까? 내 가족들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더 비극인 일이 아닐까? 혹은 그런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 집 근처에 머무르며 달려올 나를 마중 나오진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더욱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다면 저는 다시 번개를 맞거나 굴러들어 온 돌에 머리를 찧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는 게 과연 옳은 방향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모든 경우의 상황에서 비난을 피할 방법은 발을 멈추지 않는 것뿐 만이다. 이것만큼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래서 아무튼 저는 다시 달립니다. 도착한다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뛰어왔는지 짐짓 모른 체하며 털어놓고 싶습니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이런 고생들이 다 보상받는 기분이네요.

비라도 내려주지 않으려나, 잠시 쩅한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세 번째 산을 넘고 있습니다. 마지막 산은 사실상 제게 언덕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차오르는 게 느껴지지만 계속 달립니다. 이렇게 미친 듯이 장시간 뛰어본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뒤에서 까악 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를 지나쳐간 까마귀 떼들이 어째선지 다시 이곳으로 왔나 보네요. 반사적으로 더욱 힘차게 먼지를 날리며 뛰어갑니다. 그들에게까지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숨도 더욱 크게 내쉬며 뜁니다. 저 새들이 내 영웅담을 여기저기 전하리라. 그렇게 믿으며 그들이 머무를 때 만이라도 후들대는 다리에 힘을 줘 억지로 내닫습니다.

바로 그때, 작은 돌 하나가 제가 디딘 오른발 아래에서 굴러내려 가며 중심을 잃고 몸이 앞으로 쏠립니다. 잽싸게 반댓발로 땅을 세게 짚었지만 좀 전에 늘어난 인대 때문일까요, 그 충격을 온전히 지지해주지 못합니다. 삐어버린 왼발과 뒤로 내빼진 오른발 때문에 꽤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네요. 하필이면 까마귀들이 보고 있을 때에! 얼굴이 붉어짐을 느끼고 빠르게 중심을 찾기 위해 억지로 몸을 폅니다. 찰나라면 보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땅을 딛으려는데 몸은 나선으로 꼬인 데다가, 양 발은 쭉 멀어졌고, 성급하게 일어나려니 엉덩이가 제 얼굴보다 앞에 가 있네요. 이게 무슨 일인가, 이게 무슨 치욕이란 말인가! 할 새도 없이 디딜 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무엇도 밟히지 않는 것을 이제야 발견했습니다. 저는 떨어지는 중이네요. 절벽인지도 모르고 멍청하게 몸을 미친 듯이 뒤틀고 있었나 봅니다. 의식이 바닥과 닿는 순간 머리가 희미해집니다. 아찔한 정신이 실낱같이 남아있는데, 그럴 새도 없이 무거운 철마가 저를 밟고 지나갑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소리는 들리네요.

“범퍼 나갔네 이거. 아, 진짜… 어떡하지 얘는?”

“유해조수라서 괜찮을 겁니다. 대충 밀어 두고 갈까요?”

제가 유해하다는 말일까요? 나름 세계적으로는 희귀한 입장인데… 저는 제 가치를 몰라주는 이 나라가 정말이지 싫습니다. 그나저나, 불이 난 건 맞을까요? 확인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침의 그 녀석, 까투리가 아니라 어린 뻐꾸기였나… 가족은 제가 잘 사는 걸로 알고 있을 테죠. 저 멀리서 까악 소리와 아악 아악 대는 고라니 비명소리가 지저분하게 뒤섞여 들려오는 듯합니다. 태양이 반드시 뜨는 건 아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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