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으로부터 사람 6.
채집통에 비축해 놓은 먹이용 곤충들은 종종 생각지도 못한 탈출을 감행한다. 눈으로 보는 몸의 크기와 빠져나올 수 있는 틈의 크기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옛날 요기 다니엘 아저씨나 통아저씨처럼 몸을 이리저리 접고 구르며 빠져나오는 것일까. 물론 아들이 곤충 녀석들 숨 잘 쉬라고 채집통 뚜껑을 살짝 열어놓은 걸 들킨 적도 있었다.
지금이야 집 안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내 눈앞에만 나타나지 말아 주라, 제발.
하고는 내 할 일을 하지만 초반에는 드드드득, 다다다닥, 호로로록, 그르르륵 등등의 소리가 나면 소스라치게 놀라 아들이나 남편을 부르곤 했다. 어느 날엔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발밑으로 펄쩍펄쩍 메뚜기가 뛰었고 또 어느 날엔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정수기 밑에서 귀뚜라미가 울어 부들부들 놀라기도 했다.
귀뚜라미는 생긴 것도 징그럽고 채집도 쉽지 않다. 언뜻 보면 바선생(바퀴벌레, 나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싫어서 그냥 늘 바선생이라 부른다) 혹은 꼽등이와 착각할 정도로 모양이 비슷한데, 그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식용이 가능한 깨끗한 곤충이란다. 또한 지방이 많은 밀웜(가장 간편하게, 채집하지 않고 사서 먹일 수 있는 반려곤충용 먹이)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엄청 높아서 사마귀를 포함한 다양한 반려동물의 먹잇감 중 가성비 최고로 알려져 있다. 대빵이도 이 녀석을 제일 좋아했다.
대표적인 친곤충적(!) 노래,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는 청아한 귀뚜라미 소리로 시작한다. 곧이어 등장하는 개구리 소리에 살짝 밀린 감이 없지 않지만, 그 노래의 시작엔 누가 뭐래도 귀뚜라미와 담백한 기타 선율이 있다. 이 노래의 귀뚜라미 소리가, 별이 지는 시골 풍경의 포근한 서사를 알리는 음률이라면, 내가 정수기 밑에서 발견한 녀석의 소리는 불순물이 단 1%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생수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한음 한음 정확하고 또렷하게, R&B 가수의 멋드러진 기교가 아닌 이제 막 노래를 불러보려는 혀 짧은 아이의 목소리랄까. 기립 박수를 칠 정도로 웅장하고 멋있는 건 아닌데 듣고 있자니 뭔가 머릿속이 쨍, 하고 맑아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무도 깨어있지 않는 깊은 밤에, 미동도 없이 울어대는 귀뚜라미는 나와 단둘이 진공 병 안에 마주한 채 멈춰진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는 이웃인 듯했다. 무서움을 뒤로 하고, 녀석의 고독한 연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커피를 마셨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거슬리지도 늘어지지도 않는 적당한 텐션, 고즈넉한 자세로 한 편의 연주를 들려주는 그 미물은 오롯이, 자연이었다.
정신 차려. 저건 엄청나게 빠르고 점프도 해 댄다고!
그래, 나는 벌레공포증이었지. 나는 감성에 푹 빠진 정신을 탈탈 털고, 작은 종이컵을 하나 들었다. 누가 깨서 이 녀석을 케이지에 넣어줄 때까지 격리해야만 했다. 한쪽 눈을 꾹 감고 최대한 시선을 흐리게 만든 후, 종이컵으로 냅다 덮었다. 혹여나 더듬이 하나라도 다칠 일 없게, 고이고이 잘 있기만 해 달라는 마음으로.
뚝.
종이컵에 갇힌 귀뚜라미는 노래를 멈췄다.
나는 왜 자꾸 이것들에게 미안하기만 할까. 일면식도 없는 꼬마한테 잡혀서 낯선 집으로 온 것도 모자라 곧 대빵이의 먹잇감으로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텐데, 저 곤충은 울음인지 노래인지 모를 마지막 소리까지 내게 빼앗기는구나.
아침이 왔을 때, 귀뚜라미는 종이컵에서 탈출한 뒤였다. 아들의 원망을 뒤로한 채 속으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며칠 뒤, 굶주린 탓일까 귀뚜라미는 다른 방 창문 밑에서 모로 누워 죽어있었다. 저기만 넘으면 다시 밖인데, 자유인데, 그 벽을 넘지 못하고 힘없이 죽고 말았다.
뭔가 이것저것 첨가되지 않은 담백한 요리가 먹고 싶어 냉장고에 넣어 둔 채소들을 꺼낸다. 애호박을 뭉툭하게 자르고, 가지도 툭툭 몇 번만 썬다. 양파는 한번 자르고 또 한 번만 더, 버섯들은 손으로 대충 찢고, 브로콜리와 당근도 툭. 올리브유를 몇 바퀴 두르고 소금만 살짝, 오븐에 넣어 구운 채소가 깨끗하고 꽤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