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굴씨 Aug 15. 2023

오롯한 귀뚜라미와
그대로의 채소구이

곤충으로부터 사람 6.

블러 처리한 귀뚜라미 사진이 있습니다.




채집통에 비축해 놓은 먹이용 곤충들은 종종 생각지도 못한 탈출을 감행한다. 육안으로 보는 몸의 크기와 빠져나올 수 있는 틈의 크기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옛날 요기 다니엘 아저씨나 통아저씨처럼 몸을 이리저리 접고 구르며 빠져나오는 것일까. 물론 아들이 곤충 녀석들 숨 잘 쉬라고 채집통 뚜껑을 살짝 열어놓은 걸 들킨 적도 있었다.

지금이야 집 안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내 눈앞에만 나타나지 말아 주라, 제발.


하고는 내 할 일을 하지만 초반에는 드드드득, 다다다닥, 호로로록, 그르르륵 등등의 소리가 나면 소스라치게 놀라 아들이나 남편을 깨우곤 했다. 어느 날엔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발 밑으로 펄쩍펄쩍 메뚜기가 뛰었고 또 어느 날엔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정수기 밑에서 귀뚜라미가 울어 부들부들 놀라기도 했다.




귀뚜라미보다, 긴 손톱에 눈이 가는 천생 어미. 곤충 무서워하다가 손톱도 못 깎아줬네, 흑


귀뚜라미는 생긴 것도 징그럽고 채집도 쉽지 않다. 언뜻 보면 바선생 혹은 꼽등이와 착각할 정도로 모양이 비슷한데,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식용이 가능한 깨끗한 곤충이란다.


귀뚜라미는 지방이 많은 밀웜(가장 간편하게, 채집하지 않고 사서 먹일 수 있는 먹이)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무지 높아서 사마귀를 포함한 다양한 반려 동물의 먹잇감 중 가성비 갑으로 알려져 있다. 대빵이도 이 녀석을 제일 좋아했다.  


냠냠냠 야미야미!




대표적인 친곤충적(!) 노래,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는 청아한 귀뚜라미 소리로 시작한다. 곧이어 등장하는 개구리 소리에 살짝 밀린 감이 없지 않지만, 그 노래의 시작엔 누가 뭐래도 귀뚜라미와 담백한 기타가 있다. 이 노래의 귀뚜라미 소리가, 별이 지는 시골 풍경의 포근한 서사를 알리는 음률이라면, 내가 정수기 밑에서 발견한 녀석의 소리는 불순물이 단 1%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생수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한음 한음 정확하고 또렷하게, R&B가수의  기교가 아닌 이제 막 노래를 불러보려는 혀 짧은 아이의 목소리랄까. 기립 박수를 칠 정도로 웅장하고 멋있는 건 아닌데 듣고 있자니 뭔가 머릿속이 쨍, 하고 맑아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무도 깨어있지 않는 야심한 밤에, 미동도 없이 울어대는 귀뚜라미는 나와 단둘이 진공 병 안에 마주한 채 멈춰진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는 이웃인 듯했다.




무서움도 뒤로 하고, 녀석의 고독한 연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커피를 마셨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거슬리지도 늘어지지도 않는 적당한 텐션, 고즈넉한 자세로 한 편의 연주를 들려주는 그 미물은 오롯이, 자연이었다.


정신 차려. 저건 엄청나게 빠르고 점프도 해 댄다고!


그래, 나는 벌레공포증이었지. 나는 갬성에 푹 빠진 정신을 탈탈 털고, 작은 종이컵을 하나 들었다. 누가 깨서 이 녀석을 케이지에 넣어줄 때까지 격리시켜야만 했다. 한쪽눈을 꾹 감고 최대한 시선을 흐리게 만든 후(적나라하게 보는 건 아직 무리이므로), 종이컵으로 덮어 두었다. 혹여나 더듬이 하나라도 다칠 일 없게, 고이고이 잘 있기만 해 달라는 마음으로.


뚝.


종이컵에 갇힌 귀뚜라미는 노래를 멈췄다.


거기에서 노래하면 스피컨데. 귀뚜라미야 미안.

나는 왜 요즘 이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만 할까. 일면식도 없는 꼬마한테 잡혀서 낯선 집으로 온 것도 모자라 곧 대빵이의 먹잇감으로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텐데, 저 곤충은 울음인지 노래인지 모를 마지막 소리까지 내게 빼앗기는구나.


아침이 왔을 때, 귀뚜라미는 종이컵에서 탈출한 뒤였다. 아들의 원망을 뒤로한 채 속으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며칠 뒤, 굶주린 탓일까 귀뚜라미는 다른 방 창문 밑에서 모로 누워 죽어있었다. 저기만 넘으면 다시 밖인데, 자유인데 그 벽을 넘지 못하고 힘없이 죽고 말았다.




뭔가 이것저것 첨가되지 않은 담백한 요리가 먹고 싶어 냉장고에 넣어 둔 채소들을 꺼냈다. 애호박을 뭉툭하게 자르고, 가지도 툭툭 몇 번만 썰었다. 양파는 한번 자르고 또 한 번만 더, 버섯들은 손으로 대충 찢고, 브로콜리와 당근도 툭. 올리브유를 몇 바퀴 두르고 소금만 살짝, 오븐에 넣어 구운 채소가 깨끗하고 꽤 맛있었다.




다음 편 이어집니다.     



이전 06화 모닝 메뚜기 한 개 하실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