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을 오래 해본 사람은 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해도 시간이 지나면 정든 사람이 생기고, 단지 내 기분 만으로 하기 힘들다. 우리는 그것을 책임이라 부른다.
그녀의 부재를 아는 걸까? 새롭게 모임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고, 남은 우리는 말이 퍽 줄었다. 독서모임을 진행하는 나이지만 책도 멀게 느껴지고 지겨워져서 읽지 않았고, 글 쓰던 펜도 어디 굴러다니다가 침대 밑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게임이라도 해볼까 하고 켰다가 이 게임 저 게임 조금씩 해보다 껐다. 재미없기는 매한가지다.
주말에 집에만 누워있으니 허리만 아프다.
청사포로 산책이나 할까
늦은 봄이라 여름을 예고하듯 더워지는 시간도 있다. 가볍게 입고 나오니 오늘은 햇살이 포근한 게 딱 걷기에 좋은 날씨다. 안에만 있으니 좋은 날이 와도 알 턱이 있나. 생수 한 병을 들고 걷는다.
해운대 독서 살롱에 산책 나왔다고 하니, 때마침 반초님도 밥 먹고 걸으려 한단다. 함께 걷자고 해서 알겠다 했다.
"여기입니다. 반초님"
해운대 횡단보도에서 내려오는 반초님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펌을 해서 약간 곱슬한 머리를 하고, 평소에 가끔 쓰던 안경을 쓰지 않고 회색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효롱님 갑시다. 저 잘 못 따라오시면 버리고 갈 겁니다."
"반초님 안 보시이면 그냥 집에 돌아갈 건데요."
그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 안 되죠. 알았어요. 제가 잘 모시고 갈게요."
난 이런 그가 좋았다. 반초님을 보면 기운이 난다. 그의 유머와 긍정적인 태도는 내게 불어오는 차가운 생각을 막는 우산이 될 때가 많다. 난 축 늘어졌던 어깨가 떠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가 시작할 때 우리 모임에 온 것은 해운대 독서 살롱의 큰 행운이다. 유독 1퍼센트님도 그를 따르는데 이해가 간다.
"반초님 고마워요."
"제가 고마운 일들을 워낙 많이 해서요. 딱 찍어서 말씀을 해주셔야 알 것 같네요. 제가 또 무슨 좋은 일을 했나요?"
우리는 청사포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바다는 푸르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작은 배가 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우리 모임에 반초님처럼 꾸준히 나오시는 분도 없고, 항상 든든하게 지켜줘서 힘이 많이 돼요."
반초님은 항상 웃던 웃음을 그치고 나를 따뜻이 바라봤다.
"효롱님 저야 고맙죠. 이런 좋은 모임 만들어주셔서요. 오픈톡을 처음 해서 나왔는데,
그것이 해운대 독서 살롱이니 얼마나 제가 운이 좋은가요?"
나는 짐짓 놀라 말했다.
"반초님 이런 모임 처음 나오신 건가요? 몰랐어요. 워낙 사교성이 좋으시고 잘 즐기시니까 익숙하신 줄 알았어요."
반초님은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효롱님 제가 서울에서 내려오신 건 아시죠?"
"네."
"사실 내려오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말을 하는 반초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마치 먼 수평선에서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아팠어요, 그것도 많이요."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전에는 엄청 쫓기듯 살았어요. 투자도 진짜 공격적으로 하고요. 집이 날아갈 정도로 매섭게 맞아보기도 하고, 정신없이 달렸죠.
그렇게 미친 듯이 하니까 성과가 조금 있긴 있더라고요. 그런데 사람이 쉬는 날에 아프다잖아요. 그런 건지 좀 만족할 때쯤 되니까, 몸이 푹......."
그는 어깨를 올렸다가 푹 내리면서 말했다.
"효롱님 병원 이야기하려면 할 말이 많아요, 하하. 과정은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네. 그러면 지금은 괜찮죠?"
그는 무릎까지 발을 올리며 몇 번 빠르게 다리를 굴리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부산의 바람이 얼마나 깨끗한지. 엄청 좋습니다. 걱정 마세요."
조금 땀이 날 때쯤 바다가 잘 보이는 나무의자가 있어 둘은 앉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는데 적당히 오른 열기를 식혀줘서 상쾌했다.
"호롱님, 아프고 나니 뭐가 변했는지 아세요?"
그는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생각이요, 일상의 즐거움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다를 보며 살려고 내려왔어요. 당연히 저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처음 찾아본 것이 독서 모임이고."
나는 말을 받듯이 이어 말했다.
"그게 우리 해운대 독서 살롱이었군요."
"네 독서모임에 나오면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자주 생각해요. 엄청난 성취 이런 것에만 매달렸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더라고요. 한 번도 안 빠지고 나온 것은 물론 저를 위한 것이니까, 제가 항상 해운대 독서 살롱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삽니다. 하하하."
파도소리와 그의 웃음소리가 합창하듯 속 시원하게 들렸다. 참 사람의 만남이란 것은 이렇게 알 수 없고 신비한 것이구나
반초님이 처음 우리 모임에 온 날은
해운대 독서 살롱도 오프 첫 모임이었다.
어떻게 같은 날에 필요한 인연들을 이렇게 이어준 것인지 신기하다. 가끔은 인연의 실이 정말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어, 한순간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그런 당김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순수한 마음으로 원하는 지점에서 함께 생겨난다.
이래서 바다가 좋다. 저 넓은 짠 내 나는 물 덩어리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면 우리 마음까지 열려서 짜 낸 듯 속 깊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효롱님"
그는 오른손을 올려 내 왼쪽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괜히 자책하실까 봐 이야기 안 할까 했는데 그래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풍진님 모임 말이에요."
나는 동백 섬 검은 돌이 굴러온 듯 덜컥했다.
"네......"
반초님은 수그러드는 내 목소리를 듣고 이번에는 내 왼쪽 어깨를 한번 따뜻이 잡았다 뗐고 그의 마음 같은 손 온기를 느꼈다.
"그렇게 기죽지 마시라고 말하는 거예요. 풍진님 글쓰기 모임은 해체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예?...... 왜요?"
"우리와 다르게 엄청 빡빡한 일정으로 미션도 많이 줬잖아요. 사실 그게 처음에는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오래가기는 힘들어요. 우리 모임처럼 힘을 빼고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요. 둘 다 장단이 있고, 단지 이 시기에 효롱님과 맞지 않는 회원들이 연달아 들어왔을 뿐이라는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멍하니 갈매기가 날아가는 것을 봤다. 어떤 새는 재빠르게 날아가고, 어떤 새는 여행이라도 하듯이 유유하게 상공을 날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도 저러한가 싶다.
나는 반초님의 위로에 흐릿해진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면서 1퍼센트님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개인적인 연락은 반초보님과 1퍼센트님이 많이 하는지라 물어봤다.
"1퍼센트님은 1차 합격하고 나서 조용하네요. 완전 집중모드인가 봐요."
"그러게요. 저랑 자주 연락했는데 한참 연락이 안 와서 신경이 쓰이긴 하는데. 공부 때문이겠죠?"
반초보님은 막냇동생을 걱정하는 장남의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까똑
"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우리 얘기를 들은 것처럼 연락이 왔네요. 하하."
반초보님은 빙그레 웃으며 카톡을 읽다가 말을 멈췄고, 난 고요한 정적에서 불안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