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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당신이 곁에 있어 주셔서
오늘까지 걸어 왔어요.
고맙소!
‘새삼스럽게 고맙긴…’
남편 문자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을 이런 때 쓰는 것 같다
몇 년 전, 부천시립 동화도서관에 있던 ‘강정규 코너’가 확장되어 최근 꿈빛도서관 3층에 책 문화센터로 개소되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생각나도록 시에서 개인 자료들을 보관해주니 말이다. 남편은 개소식 행사 후 평소 안 하던 문자를 보내온 것이다.
올해로 남편과 함께 살아온 지 50년이 된다. 어느새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나간 시간은 왜 이렇게 으레 빠르다고 생각이 되는 건지….
남편은 제대하고 수복지구 강원도 철원에서 중학교 못 간 동생들과 가난해서 학교 못 가는 아이들을 모아 야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으로 옮겨왔고 나중에 경기도 능곡리 재건학교에까지 오게 되었는데, 같은 해 나는 입학을 하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돌이켜보면 까마득히 먼 옛날 같기도 하고 엊그제 일같기도 하다.
나는 엄마의 성화와 여학생들의 시샘으로 학교를 떠나 구로공단 가발공장 기숙사에 있으면서 검사반 소속으로 미용반에서 일하고 있었다.
남편은 친구의 배려로 자기가 있던 신문사 기자 자리를 내주고 자기는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었다. 세월이 흘러 그때만 해도 가난해서 중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고 설립자와 이견이 생겨 사임하고 취직자리까지 생겼지만 정작 살 곳이 없었다. 남편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론 학교 근처 구멍가게에 외상값만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의 제자 사랑이 시나브로 정인으로 바뀌어 연서를 끊임없이 보내왔지만 나는 마음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많은 나이 차이는 차치하고 그런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시골 출신에다 학력이라곤 중졸도 안되었다. 작가의 아내로선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가난한 집 8남매 맞이로 동생들을 자식처럼 책임져야 하는 그 사람의 형편을 아는데 매정하게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차 친구 소개로 취직이 되고 서울로 올라와야 할 형편이고 결국 남편 뜻대로 방을 얻어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 방을 얻는 곳이 안양유원지 근처 여인숙이었다. 그 여인숙은 나이든 할머니가 어린 처녀 아이를 식모로 두고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손님은 거의 없는 곳이었던 것 같다. 보증금이 없이 한 달 5,000원을 주기로 하고 사실 주인 할머니 배려로 별채에서 살기로 했다. 우리는 안양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살림살이를 샀다. 냄비와 접시 숟가락과 쓰레기통 등이었다.
내일은 첫 출근하는 날이었다. 잠을 자야 하는데 밤이 깊어도 잠아 오지 않았다. 내가 뒤척거리면 옆에서 자는 사람도 잠을 못 잔다는 생각에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았다.
“연탄가스인 것 같다. 밖으로 나가자!”
잠에서 깨어난 남편이 말했다.
밖으로 나와 장독대가 있는 뒷마당에 엎드려 있었다. 그 사이 안방에서 자던 식모 아이가 동치미 국물을 떠다 주어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우리가 누웠던 마당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있고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었다.
“내 방에 와서 눈을 부쳐요. 내일 출근들 한다면서…….”
주인집 할머니의 배려로 안방에서 눈을 부쳤다. 잠을 자기나 한 건지 우리 부부는 으스스한 채 몸을 떨고 이른 아침 버스를 탔다. 나는 구로공단 입구에서 내리고 남편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면접을 봤다. 1973년 11월 11일, 그러니까 그날이 결혼기념일인 셈이고 크리스챤신문사 입사일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연탄가스가 새던 방에서 안채로 옮겼다. 짐이 없으니 별로 옮길 것도 없었다. 양은 냄비 하나, 밥공기 두 개, 접시 두 개, 그러니까 안양시장에서 구매한 소꿉장난처럼 단순한 살림살이였으니 말이다.
하루는 퇴근해 온 남편이 젓가락 한 쌍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살림 늘었어.”
남편 책상 서랍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아마 남편에게 자기 자리를 인계한 친구가 미처 챙기지를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밤이 생일날 저녁이었다. 나는 내 생일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당신 생일 선물이야.”
남편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에 사과가 대여섯 알 들었던 것 같다. 생일선물로 100원어치 사과를 사 온 것이다. 후식으로 사과를 먹는 것은 텔레비전에서나 나오는 부잣집 일인 줄만 아는 시절이었다.
그해 말, 성북동에서 목회하는 남편 친구 최완택 목사가 이사를 오라고 했다. 통근 거리도 먼데다 친구를 여인숙에다 두기가 걸렸던지 교인 집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부엌을 같이 쓰는 방이었는데 2만 원에 6천 원짜리였다. 나중에 주인아주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보증금을 이야기했더니 목사님 댓구가 그 집엔 돈이 없다고 했단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돈이 없냐고 물어보고 2만 원으로 깎아주었다고 했다.
느닷없이 이사를 오니 문제는 내가 다니는 직장이 멀어진 거였다. 연탄불에다 밥을 해 먹고 구로공단까지는 참 멀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다. 얼마 동안 다니다 결국에는 그만두게 되었다.
그즈음 대학에 입학한 시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 밥 먹으며 하는 말이 친구와 자취를 한다고 했다.
“우리 집에 와 같이 살아요. 내가 직장도 그만두었으니 밥해 드릴게요.”
그래서 나이가 나보다 2살 더 먹은 시동생과 같이 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참 착하기도 하다. 나이 많은 시동생과 한방을 쓰다 보니 불편한 점이 참 많았다. 우선 저녁이면 잠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늦게 오는 날이면 어색해서 함께 있기도 불편했다. 그런 날이면 부엌에 나와 부뚜막에 앉아 있었다. 그러는 나를 보고 주인아주머니가 불렀다.
“새댁, 이리 와서 텔레비전 봐요.”
그럴 때는 주인집 안방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다 주인집 아저씨가 퇴근하면 밖으로 나와 골목을 왔다 갔다 돌아다니기도 했다.
직장을 그만두자 이상하게 몸이 힘들었다. 아침을 해 주고 밥상도 내가기 힘들 만큼 몸이 자꾸 까라앉았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까라져서 종일 누워있었다. 남편이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대림동에서 야학을 같이하던 친구 소개로 병원에 가니 임신이란다.
‘친정집에서는 같이 사는 줄도 모르는데….’
나는 아기를 안 낳겠다고 했다. 남편은 아기를 낳지 않으면 안 살겠다고 강력하게 말했다.
신혼 시절 나의 소원은 30만 원짜리 전세방을 사는 것이었다. 크리스챤신문사 기자로 취직했을 때 첫 월급이 2만 7천 원인가 했다. 나는 그 돈으로 시댁에 만원을 보내드렸고 만 원씩 붓는 30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다. 월세를 6천 원 주고 전기세 수도세를 주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생활비가 없었다. 그때 신문사에서는 날마다 취재비를 주었다. 남편이 점심을 먹고 남은 돈을 몇백 원씩 남겨다 주었다. 그것을 모아 쌀을 샀다. 일반미는 정부미를 한 포대 사서 싱크대 속 들통에 넣고 밥을 해 먹었다. 그 들통에 있는 쌀을 공기로 가끔 헤아렸다. 언제까지 먹을 수 있나 가늠하는 계산이었다. 어쩌다 남편 친구라도 오면 그만큼 쌀이 없어지고 그만큼 끼니를 때우지 못했다.
집 옆에는 개천이 있었고 통나무 다리가 놓여있었다. 길 건너는 쌀가게가 있었다.
‘아저씨, 정부미 한 포대만 외상으로 주실래요?’
나는 그 말을 입안으로 몇 번씩 되뇌며 불러오는 배를 내밀고 통나무 다리며 몇 번이고 오갔다. 그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임신한 몸으로 밥도 제대로 못 먹으니 저녁이면 뼛속이 쑤셨다. 약방에 가서 약사에게 물었더니 임신을 해서 제대로 영양 섭취를 못 하면 아기가 영양분을 빼앗아 먹어 그런 거라고 했다. 남편은 가끔 시장에서 순대 200원어치를 사 왔다. 임산부한테는 돼지고기가 좋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 알고 있지만 고기 살 돈은 없다 보니 순대를 사 온 것이다. 그 시절 그 순대는 추억의 음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