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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남편 친구 최 목사가 교회 곁으로 이사 오라고 한 건 남편한테 교회 일을 도와 달라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남편은 청년부를 담당하고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예배에 참석했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나면 목사님 어머니 이상일 권사는 가끔 사택에 들렀다 가라고 하였다. 때마다 된장을 한 사발 퍼 주시든지 양념 많이 한 거라며 섞박지를 한 통 주시기도 했다.
“새댁은 목사님네서 얻어다 먹네. 우리는 목사님 댁에 갖다 드리는데.”
싸 온 반찬을 보고 주인아주머니가 말했다.
이상일 권사는 이북에서 피난 온 분인데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분을 나는 지금도 믿음의 어머니로 생각하고 그때 얻어먹었던 된장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집에서 6개월을 살다 그리 멀지 않은 삼양동으로 이사를 했다. 10만 원에 7천 원짜리 방이었다. 한 달 쯤 살다 보니 부엌을 같이 쓰는 작은 방은 5만 원에 5천 원이라고 했다. 얼른 그 방으로 이사를 했다. 2천 원을 아끼기 위해 같은 집에서 방을 옮긴 것이다. 캐비닛 놓고 책상을 놓고 나니 참 좁았다. 좁다는 생각도 안 하고 여전히 배를 곯아가면서 적금은 꼬박꼬박 넣었다.
“그렇게 안 먹으면 저만 손해지.”
부엌에서 젊은 주인아줌마가 내 흉을 보는 소리가 방안까지 들렸다. 거의 만삭이 되어 오는데도 나는 안 먹으면 안 먹는 만큼 남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느 날 밤 남편은 친구를 다섯 명이나 데리고 왔다. 퇴근 후 술을 마시고 2차를 우리 집으로 온 셈이다. 밤은 깊어지고 좁은 방에서 함께 잘 수도 없었다. 손님 시중을 들다가 주인집 할머니가 주무시는 거실로 살그머니 들어가 눈을 부치고 손님 아침밥을 챙겨주었다. 사람 좋은 남편은 눌자리 생각은 못 하고 ‘우리 집 가자’를 입에 붙여두고 산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부부가 출근하고 나면 주인집은 조용했다. 얼마 전까지는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와 어린 딸이 함께 살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어느 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 것 같았다. 그해 광복절이었다. 우리 부부는 주인집 마루 끝에 걸터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10시 정각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기념사를 하는데 갑자기 화면이 지직거리며 흔들렸다. 얼마 후 기념사를 다시 이어 갔다. 바로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있었던 날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아기를 낳고 싶은데, 간신히 갖게 된 유산이 되어 상심이 큰 상태였다. 미장원 미용사였는데 시내 꽤 유명한 곳인 것 같았다. 쉬는 날 내 머리 파마를 해주었다. 아기를 낳을 새댁이 생머리인 게 마음이 쓰였나 보다. 파마하던 날 배가 가끔 뜨금거렸다. 평소와는 좀 느낌이 달랐다. 옆방에 사는 새댁은 제왕절개 수술을 했는데 돈이 많이 들어 걱정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남편 친구 목사가 산부인과 하는 권사를 소개해 주었다. 저녁을 먹고 전화를 했다. 집이 멀면 저녁에 오라고 했다. 정류장으로 남편과 버스를 타러 갔다. 그때는 버스가 세가지 종류가 있었다. 좌석과 입석이 있었는데 차비가 달랐다. 나는 굳이 기다렸다가 입석 버스를 타고 갔다. 병원에서는 입원하라고 했다. 밤새 진통이 올 때마다 네방 귀퉁이를 돌았다.
“애 낳을 땐 네 귀퉁이를 돌아다니면 쉽게 낳을 수 있다.”
친정엄마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게 했다.
아침이 되었다.
“애기 잘 낳고 있어. 나 회사 갔다 올게.”
남편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분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제대로 못 먹어서인지 초산이어서 그런지 죽을 만큼 힘겨웠다.
“힘을 줘요!”
“못하겠어요!”
“그 애가 안 놓을 거예요!”
여의사는 분만대 위에 나를 눕혀 놓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조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남은 죽을 지경인데 여유로운 것 같아 미웠다. 나중에 교회에서 만났을 때도 고마운 마음보다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병원에서 이틀 있다가 퇴원할 땐 택시를 타고 왔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아기를 꼭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시라는 거에요.”
간호사가 따라 나오며 말했다. 처음 만난 사람 부탁이 의아했다. 집에 오니 시어머니가 와 계셨다. 5살 먹은 시동생을 업고 산구완을 해주러 오셨다. 그때까지 늦둥이 시동생은 젖을 빨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시동생 한 번 젖을 물리고 내 아이에게도 젖을 빨렸다. 속으로는 싫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좁은 방에서 다 자야 하는데 정작 산모인 나는 누울 곳도 없었다. 아기를 안고 앉아 있었다. 주인집에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시어머니는 그냥 낮이나 밤이나 잠만 주무셨다. 미역국이라고 끓여 주는 것은 먹을 수도 없었다. 짜지 않으면 싱거웠다. 그러다 며칠 안 있어 할아버지 제사 지내야 한다고 내려가셨다. 아기 낳은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기저귀를 빨아 옥상에 널곤 했다. 산후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아팠다. 몸조리도 못 하고 잘 먹지도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기 낳았다고 다니러 온 사촌 시누이가 통장을 훔쳐 갔다. 손님 왔다고 시장 다녀온 사이 통장과 도장을 가져가 해약을 해 간 것이었다. 30만 원짜리 전세방 꿈이 날아갔다. 정신이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갓난아이를 업고 전농동에 사는 시누이 집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미안하다고 하더니 몇 번 가니까 극성부리지 말라고 했다. 그 돈은 받지 못했지만 어떻게 했는지 아이가 돌 때쯤 되었을 때 30만 원짜리 전세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수도는 없었지만, 부엌은 따로 있었다. 안마당 수도에서 빨래도 하고 물이 필요하면 그곳을 이용했다. 주인집에는 아이들이 둘 있었고 아이 보는 어린 여자아이도 있었다. 경상도 사람 목소리는 참으로 시끄러웠다. 집에 손님들이라도 오면 싸우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남편이 받는 월급을 생활비로 썼으면 밥은 굶지 않고 살았을 텐데 나는 분수 이상으로 저축을 하고 시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와선 돈을 요구했다. 함께 살던 시동생이 군대에 가자 셋째 시동생이 빨래를 한 보따리씩 들고 오곤 했다. 30만 원 전세방으로 옮기고 얼마 안 되었는데 어느 날 집달리들이 와서 주인집 여기저기 빨간 딱지를 붙였다.
‘어쩌지? 우리 전 재산이 이 방값인데 ….’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즈음 남편 직장이 원효로로 이사를 했다. 직장이 멀어져 출퇴근이 힘들 것 같아 이사를 하자고 했다.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오면 되지만 직장은 매일 가야 하니까. 그래서 남편 직장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다섯 번째 이사다. 판잣집같이 허름한 집이었지만 방이 2개였다. 아마 70만 원 전세였던 것 같다. 남편 공부방도 마련했다. 남편이 승진도 하고 월급도 올랐던 것 같다.
“김철배 씨 4월 15일 날, 결혼식 한대. 우리도 같이할까?”
어느 날 남편이 느닷없이 말했다. 친정집에 가서 결혼식을 하겠다고 했다.
“그까짓 놈의 집으로 시집가는데 해 주긴 뭘 해 주니? ”
엄마는 욕을 하며 화를 내셨다. 그러면서도 솜이불 한 채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것을 버스에 싣고 남영동 집까지 울면서 돌아왔다.
결혼하면서 나는 호마이카 화장대가 갖고 싶었다. 옆방에 사는 아줌마가 화장대 서랍에 옷을 정리하고 거울도 있고 화장품을 정리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부러웠다.
‘오빠들이 만 원씩만 보태서 그걸 사주면 좋겠다’
그러나 큰 올케가 혼자 만 원을 주고 나머지는 안 줘서 못 장만했다.
기독교방송국 회의실에서 결혼식을 하고 철원 시댁으로 갔다. 초가집엔 방이 두 칸 있었다. 안방에선 동네 아주머니들이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작은방으로 자러 왔더니 시동생들이 줄지어 자고 있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니 발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얼떨결에 결혼식을 하고 다시 이사했다. 숙대 근처였는데 집이 제법 번듯했다. 안방과 마루방 두 칸 부엌도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을 가려면 주인집 안으로 들어가서 볼일을 봐야 했다. 남편은 주로 회사로 가서보고 나는 하수도에서 소변을 봤다.
그해 겨울이었다. 날씨가 추워지더니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이 얼어버렸다.
“애기 엄마, 화장실 물이 얼어 물이 안 내려가네, 신랑한테는 회사 가서 볼일 보고 새댁은 뒤뜰 꽃밭에다가 볼일 봐야겠네.”
주인댁이 말했다.
“네.”
그 집 울타리 아래 작은 채마밭이 있었다. 대답은 했지만 젊은 여자가 엉덩이를 내놓고 똥을 누는 일은 차마 못 할 일이었다. 어쩌다 그 쪽을 바라보면 똥덩이 같은 것들이 얼어붙어 있는 게 보였다. 주인집은 정말 똥을 거기다 누는 모양이었다. 나는 둘째를 임신해 만삭이었다. 똥이 마려우면 부엌 하수구에다 해결하고 수돗물을 쏟아부었다. 한편 정화조로 내려가다 막히는 일은 없을까? 말은 안 해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만삭인 배를 안고 목욕탕을 자주 다녔다.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 목욕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애기는 안 놓고 왜 목욕만 와요.”
목욕탕 주인이 걱정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혈압이 높으면 언제 쓰러질지 몰라요.”
산부인과에 가면 의사가 겁을 주었지만 나는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임신중독이어서 혈압이 높다고 했다.
‘애를 낳다가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남모르게 집안 정리를 해나갔다. 내가 아기를 낳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면 사람들이 집안을 둘러보고 살림도 더럽게 살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둘째 시누이가 산후조리를 해 주겠다고 와 있었다. 어느 날 밤 산기가 있어 평소 다니던 산부인과엘 갔다. 그리고 남편에게 부탁했다.
“집에 가서 잠옷 좀 가져다줘요.”
집에 간 남편은 함흥차사였다. 임신복이 없어 평소 입던 월남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배가 불편해서 원피스 잠옷을 갖다 달라고 했다.
둘째를 임신하고 배가 불러오면서 나는 해가 어두워지면 빨리 잠옷으로 갈아입곤 했다. 그런데 가끔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다. 남편 진상 친구가 한 잔하고 찾아와 방문 밖에서 부를 때였다. 때마다 난감했다. 남편은 아직 집에 안 왔는데 문밖에서 부르니 얼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아직 급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진통이 와서 왔다고 하니까 간호사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단 일찍 아가를 낳았다. 첫애 생각하고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 아들이야?”
남편이 병원에 와서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열 달 내내 “우리 딸! 우리 딸!” 했는데 또 아들이었다.
“뭐 낳았어?”
“아들이요.”
“원 욕심도 많지.”
어디 다녀온 원장이 간호사에게 묻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 옆방 산모는 딸을 셋 낳고 또 딸을 낳아서 울고 있었다.
입원실에 누워 남편에게 왜 잠옷을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회사에 갔는데 친구가 왔더라고. 그 친구가 애는 때가 되면 저절로 나오는거니까 술이나 한 잔하고 가라더라고.”
아기 낳고 경황이 없어서인지 서운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