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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이령 Oct 10. 2023

봄날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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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갔다.

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봄꽃이 미쳤다. 어딜 봐도 다 꽃이다. 시합이라도 하듯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 한꺼번에 피어난다. 어지간하면 외출을 싫어하는 나도 봄 신령이라도 들린 것인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이런 날은 봄나들이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침밥을 먹으며 남편에게 물었다.

  “소래포구 가서 회 먹으면 좋겠는데.”

  보기보단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남편이 응수했다. 소래포구는 남편이 부추겨서 몇 번 따라간 적이 있다. 차를 몇 번 갈아타야 한다. 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선녀마을 가면 어떨까요? 아버지 산소도 다녀오고요.”

  갑자기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내가 말했다. 

  “그럼 그러지.”

  “참 지난번 문학상 탔을 때 수상소감에 아버지 산소에 인사 가야겠다고 했는데 ….”

  “그래 다녀 왔어?”

  “마음으로만 가고 아직 못 갔네요.”

  밥을 먹다 말고 다섯째 오빠한테 전화했다.

  “별일 없어요? 모처럼 생각나서요.”

  “그려, 내려오려고?”

  “그러게 아버지 산소도 들르고 바람도 쐬고 그럴까 싶네.”

  “그려, 떠날 때 전화해, 내가 달미역으로 마중 나갈게.”

   친정 나들이 가면 오빠는 서해안선 달미역으로 마중 나온다. 걸을 만한 거리지만 오빠의 배려다. 

  소란 카페지기가 운영하는 ‘4월의 부엌’에서 공수받은 김밥 거리로 김밥을 몇 줄 싸고 냉장고에 있는 짭잘이 토마토와 물 등 간단한 소풍 준비를 했다. 

  고향이기도 한 선녀마을은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땐 자주 가던 곳인데 두 분이 떠나시고 나니 별로 갈 일이 없다. 가끔 명절이나 생신 때 성묘하러 간다. 그때나 친정 식구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빠 차를 타고 부모님 산소에 먼저 들렀다.

  입구 철조망 대문에 열쇠 대신 걸어 놓은 철사 달팽이를 열고 들어서니 산소 두 개가 나란히 보인다. 윤 씨 선산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산소 둘레로는 목련이 피어나고 있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나란히 누워 있고 오빠들 죽으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 놓은 빈터에 막내 동생이 채소들을 가꾸고 있다. 남동생은 날마다 이곳에 와서 산소를 돌본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는 찌는 듯한 8월 더위에 잔디가 타죽을까 봐 매일 물을 길어다 봉분에 뿌렸다고 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내가 챙겨 줘야지.”

  아버지가 때마다 농사지은 걸 챙겨주는 걸 봐서 그런지 남동생은 어쩌다 친정엘 가면 이런저런 푸성귀를 차에 실어준다.

  아버지는 유복자로 태어나 일곱 살부터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장 노릇을 하셨단다. 내가 친정에 가면 자식처럼 키우신 푸성귀들을 ‘너 좋거들랑 다라도 가져가라’며 보따리를 꾸려 지게에 지고 고개 넘어 정류장까지 오셔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가 차에 실어주시곤 했다. 그 아버지가 저 무덤 안에 말없이 누워 계신다. 

  부모님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지나는데도 어떤 때는 친정집을 생각하면 그분들이 살아계실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아버지는 새벽에 대문을 열고 쇠죽을 쑤시면서 매월 초하룻날이면 잊지 않고 한 말씀 하셨다.

  “오늘은 초하룻날이다. 구순 하게들 지내라.”

  아버지 말씀을 잠결에 들으며 아랫목으로 파고들었다.

  소는 아버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나무를 해다 팔아 송아지를 사고, 그 소가 자라면 소와 함께 멀리 오이도까지 가서 품을 팔아 땅을 장만하고, 그렇게 소처럼 사셨다. 쇠죽을 쑤고 나선 엄마가 일어나기 전 큰가마솥에 물을 데워 놓으셨다. 엄마가 아침밥 지을 때 춥지 말라고 그러신 것 같다. 우리 팔 남매는 엄마가 밥을 지으시면 뒤늦게 일어나 가마솥에서 김이 폴폴 나는 더운물로 세수를 하고 학교에 가곤 했다.     

  부모님 묘 앞에 집에서 가지고 간 김밥과 과일을 펼쳐 놓았다.

  “ 우리 인사드리자.”

  충청도 출신 남편이 말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도 남편은 친정에 가면 큰절로 인사를 드렸다.

   남편 옆에 내가 섰다. 내 옆에 오빠가 섰다. 

   “태만이네 왔어요.”

   남편이 절을 했다. 나와 오빠도 남편을 따라 절을 했다. 

  “싸우지들 마세요.”

   오빠가 웃으며 말했다. 

  성미가 까탈스러운 엄마는 늘 아버지에게 지청구를 해대셨다.

  “알았으니 그만 하세요.”

  아버지는 때마다 온순한 말로 엄마를 잠재우셨다. 

  전주 이씨 왕손이라며 유난히 자존심 강한 엄마가 요양원에 계실 때 짬 내 찾아가면 엄마는 늘상 변함없이 ‘밥 먹어야지’라고 하셨다. 멀리서 찾아온 가난한 딸이 배가 고플까 걱정이 되어서였을 거다. 나를 생각하면 엄마는 늘상 가슴 한구석이 시리다고 하셨다. 남편이 큰오빠와 동갑 나이이고 가난한 집 팔 남매 맏며느리로 시집가서 사는 내가 아픈 손가락이었나보다. 

  큰아이 임신하고 아버지 생신 때 인사 갔을 때였다.

  “분이야, 요즘 세상에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그냥 집으로 내려와라.”

  엄마는 고개 너머 버스정류장까지 힘겹게 따라오시며 내 결혼을 그렇게 반대했다. 아마 세상을 먼저 산 사람의 눈에는 딸의 고생길이 훤하게 보였나 보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듯 그 자리에 앉아 김밥을 나누어 먹었다.

  “오빠, 요기는 했으니 꽃구경도 할 겸 물왕리 가서 늦은 점심 먹을까요?”

  “그러지.”

  오빠는 사람 좋게 웃었다. 

  “오빠, 가는 길에 삼거리도 가 보자. 애비가 총각 때 재건학교 하던 곳이잖아. 하숙하던 동네도 들러보고.” 

  “그거 좋겠구먼.”

  남편도 옛날 생각이 나는지 그러자고 했다.      

  집에서 학교가 있는 능곡리까지는 10리쯤 되었다. 

  나는 매일 신작로를 걸어 학교에 다녔다. 손에는 영어 단어장을 들고 외우며 다녔다. 정규학교인 군자중학교에 다니는 고주물 (꽃우물) 아이들은 반대 방향으로 학교에 간다. 

  ‘계집애는 그저 일사 잘 배워 시집가는 게 최고다’라는 지론을 가지신 부모님은 당신들도 글자 모르는 게 평생 한으로 남았으면서도 내가 공부하는 것을 왜 그리 못마땅하게 여기고 구박을 했는지 참 모를 일이다. 이런 일을 두고 무지의 죄라고 하는 것 같다. 

  재건학교는 정규학교는 아니지만, 중학과정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열심히 공부했다. 1학년 말 우등상과 개근상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못했다. 그때 엄마는 학교에 가지 말고 농사일을 도우라고 매일 성화를 하였고,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의 시새움과 헛소문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다. 공부 열심히 하고 아침 일찍 학교 와서 화단을 가꾸는 나를 국어 선생님은 남달리 예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화근이었다.

  소문이 현실보다 앞서갔지만, 그때 나는 선생님은 변소도 안 가는 사람으로 생각한 숫된 여학생이었다. 나 때문에 선생님께 누를 끼치면 안 될 거라는 생각에 교복을 입은 채 구로공단 가발공장에 취직을 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 했던가, 사춘기 시절 꿈과 상처가 있는 능곡리 재건학교는 그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위에 높은 빌딩들이 들어차 있다. 학교 맞은편에 당시 남편의 하숙집이 있었다. 빈방을 하나 빌려 거기서 저녁이면 글을 쓰곤 했는데 그 방에는 책이 많았다. 남편은 책꽂이에서 책을 뽑아 빌려주곤 했는데 그 당시 시골에선 구경도 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그 책들을 빌려와 등잔불 아래서 밤늦도록 읽다가 엄마한테 한밤중 욕을 바가지로 먹곤 했다. 

  그때 그 학교가 사라졌으니 돌아볼 곳도 없었다. 학교가 있던 자리는 어렴풋이 장소만 짐작될 뿐 높은 건물이 들어찼다. 남편이 하숙하던 두일마을도 아파트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어찌 이리 변할 수 있을까?’

  그냥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학교가 있던 마을을 지나 물왕리 저수지를 찾아갔다.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함께 간 남편이 갑자기 생각난 듯 ‘따오기 문학관’에 들러보자고 했다. 머릿돌에 자기 이름도 있다고 했다. 

  휴관일이어서 밖에만 들러보고 따오기 공원에 들러 남편 이름이 새겨진 머릿돌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점심 먹을 곳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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