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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이령 Oct 10. 2023

봄날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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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갔다.

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물왕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저수지다. 둘째 오빠가 제대하고 이곳으로 세간을 나던 날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이었고 오빠는 솥단지 하나 이불 한 채 초라한 살림살이를 마차에 싣고 집을 떠나는 길이었다. 올케언니는 월남치마에 파란 슬리퍼를 신고 뒤따랐다. 

  올케언니는 그때 세간나면서 내 걱정을 많이 했다고 나중에 말했다.

  “내가 없으면 아가씨 머리는 누가 빗겨주나?”

  그게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전쟁고아인 언니는 이웃집 여우 할머니 딸네 집 식모로 있다가 집을 짓느라고 잠깐 내려와 있는 사이 오빠와 눈이 맞아 연애를 걸고 결혼식도 올리기 전 우리 집에 들어와 온갖 구박을 받으며 살다 오빠가 제대하면서 세간을 난 것이다. 

  나는 오빠 집을 우리 집보다 더 편하게 생각하고 자주 갔다. 오빠네는 군대에서 배운 기술로 이발소를 차리고 저수지 낚시꾼들에게 밥을 해서 팔고 젖소도 키우면서 농장을 하다 고향집이라는 보리밥집을 차려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았다. 그러다 몇 년 후 세를 놓고 안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은 나중에 많은 돈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지금은 캠핑카를 타고 바다낚시를 다니며 여유롭게 산다고 한다. 

  지난해 명절 즈음 올케언니 팔순이라고 조카한테 전화가 왔다. 엄청 추운 날씨여서 집 밖을 나가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안 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몰라 남편과 함께 오빠 부부 오리털 조끼를 사 들고 안양집에 갔다. 딸들이 달려와 집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렸다. 내가 업어 키운 큰조카 은혜가 말했다.

  “고모 입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엄마 생신이 설날 다음날이야. 매해 설날 모였는데 이번은 특별한 생신이어서 제날 모이기로 했어.”

  “고생했다. 요즘 집에서 음식 만드는 사람이 어딨니? 네가 효도한다.”

  나는 진심으로 조카를 칭찬했다. 은혜가 어렸을 때 올케언니는 자주 어린 것을 뒤꼍으로 끌고 가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곤 했다. 남편이 군대 가고 없는 사이 시집살이가 무척이나 힘들다 보니 분풀이가 그것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오늘 생일상을 산제사로 드리는 거지.”

  옆자리에서 밥을 먹던 오빠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체구가 작은 언니는 앉아있는 것도 힘에 겨워 보였다.

  “아가씨, 고마워. 나 이런 게 하나 사 입고 싶었어.”

  언니는 내가 사간 조끼를 입고는 설빔 받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이 언니를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오빠 말대로 팔순 생일이 산제사가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교복을 입고 오빠네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 때 물왕저수지는 띄엄띄엄 낚시꾼들이 한가롭게 낚싯대를 들이고 앉아있었다. 어느 날인가 오빠는 작은 목선에 나를 태워 손수 노를 저어 건너편까지 건네주기도 했다. 그곳에는 별장이 한 채 있었는데 마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성 같았다. 지금은 저수지를 둘러싸고 카페와 음식점들이 무수히 생겼고 곳곳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것 같았다. 

  “모처럼 한정식 먹을까요?”

  “사람 많은데 화정리 가서 염소탕 먹지. 한정식은 집에서 매일 먹는데 뭘.”

  모처럼 대접하고 싶어 한정식을 말한 내게 오빠도 남편도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여자들한테 흑염소 좋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안 먹어 본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염소탕보다 화정리 하면 작은고모가 생각나고 어릴 적 할머니 따라 고모네 가서 안산교회와 꽃우물이 생각났다. 

  내가 학교 들어가기 전 90도로 허리가 굽은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오봉산 고개를 넘어 화정리 딸네 집에 가셨다. 할머니는 효자 아들같이 지팡이를 짚으시고 나는 뒤에서 할머니를 밀어드리고 고개를 넘었다.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는 고명 손녀딸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귀애하셨는데 난 어쩌다 산소를 찾아가도 부모님 생각만 하고 집에만 다녀오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할머니 혼이 있으시면 ‘손녀딸 이뻐해야 물방개야!’ 하며 서운해하실까?

  나는 고모가 다니는 안산교회를 고모 막내딸 영숙이와 같던 것 같다. 신발을 벗어 신장에 넣고 예배당에 들어가면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 자리가 따로 있고 방석을 깔고 앉아 예배를 드렸다. 어린 나에게는 별천지같이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저녁에는 구역 식구들이 고구마를 쪄 놓고 성경 구절을 돌아가며 암송하고 교제를 나누던 모습도 기억난다. 

  고모는 시집살이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버지 생신 때 오시면, 오봉산 고개 넘어 시집갈 때 혼수라곤 가마 안에 요강 한 개였다고 푸념도 하고 호랑이 같은 신랑한테 쫓겨나 아궁이 앞에서 밤새 개 떨듯 떨었다고도 했다. 예배당을 나가게 된 것은 어느 날 어쩌다 장롱 틈에 끼어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죽을 지경이었는데 교회 장로님이 와서 기도하니까 거짓말처럼 쑥 빠져나왔다고 했다. 

  아버지 생신날은 항상 전날 오셔서 들기름에 김도 재시고 며느리들 생신상 준비하는 것 훈수도 두시며 재미있게 동네 이야기도 하셨다. 그 고모는 90세가 넘으셔서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한 교회를 70년 넘게 섬기셨다. 시골교회로 부임해 오는 목회자는 대부분 결혼 안 한 총각이었고 목사 안수만 받으면 으레 떠나곤 했단다. 고모는 겨울철 군불 때는 일과 식사를 손수 해 드렸다고 한다. 남편도 재건학교 선생 시절 거기 가서 꼽사리를 낀 적이 있는데 실은 밥을 얻어먹으려고 끼니 때까지 일부러 눌러앉기도 했단다.

  “저 강선상 또 왔어? 하고 구박도 했는데 조카사위가 될 줄 누가 알았어?” 

  고모는 지난 이야기도 하셨는데 그야말로 이제는 옛날 이야기로만 남았다.

  생각난 김에 어린 시절 가 본 그 예배당에 약속도 없이 무조건 들렀다. 낮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이 화단정리를 하고 있었다. 목사도 함께 마당 정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자 목사님은 곁에 선 내가 고모 조카인 줄 금세 알아보셨다. 고모를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고 고모는 목사를 아들보다 더 믿고 의지하셨다는데 그건 겉으로 보이는 미담이고 또 다른 숨겨진 비리도 나는 고모한테 들어 알고 있다. 고모가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고 하나님도 알고 있을 것이다.

  며느리가 집 짓다가 잘못되어 큰집이 날아가고 있을 곳이 없어 교회에서 마련해 준 학교 사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후 요양원으로 갔다가 그 돈도 낼 수 없어 거기서도 쫓겨오고, 잘은 모르지만 마지막에는 참 쓸쓸하게 삶을 마감하신 것 같다.

  고모가 마지막 계시던 꽃우물 앞 사택은 영어학교 사무실로 개조되었고 퐁퐁 샘이 마르지 않던 꽃우물은 말라 있었다. 남편이 곧잘 흥얼거리는 가수 오기택의 ‘고향무정’가사가 생각났다. 

  꽃우물과 사택 사이 한길에 서니 오래전 아버지와 고모의 해우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친정에 갔다가 고모 생각이 나서 아버지한테 같이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시더니 고모가 보고 싶으신지 같이 가신다고 하셨다. 한참 기다려도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나오시질 않았다. 가서 보니 아버지는 양말을 신으려고 하시는데 그게 신겨지지 않아 애를 쓰고 계셨다. 내가 신겨드리고 작은아들이 운전해 모시고 갔다. 

  전화를 드렸더니 고모가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차에서 내린 아버지가 “누님!” 하시며 지팡이를 짚고 다가서시며 고모를 안으셨다.

  “울긴 왜 울어? 난 괜찮아.”

  고모는 울먹이는 아버지를 달래셨다. 그게 두 남매의 마지막 만남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고모는 장례식장에 오셔서 큰소리로도 못 울고 읊조리듯 “내가 먼저 죽어야지, 네가 왜 먼저 죽니?”를 수 없이 되풀이하시면서 장례식 마지막까지 우셨다.

  이제 그 할머니도 부모님도 고모도 모두 이 세상에 안 계신다. 

 화정국민학교 운동회날 뜀박질을 하던 씩씩한 청년 재건학교 총각 선생, 지금 남편의 봄날도 갔다. 단발머리에 하얀 칼라 교복을 입고 수줍어 대답도 못하던 여학생이던 내 봄날도 갔다. 어느새 우리들의 봄날은 갔다. 추억 속에서나 찾아봐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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