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문이령 (moonys99@hanmail.net)
우리 집 식구는 넷이 되었다.
아이를 둘 키우려니까 늘 바빴다. 주인집 막내딸이 자주 놀러 와 큰아이와 놀았다. 그 큰집에 살면서 겨울이면 온 식구가 늦잠을 자고 아침밥을 먹지 않았다. 아점을 먹는데 그것도 대충 먹는 것 같았다. 우리 집 큰아이 밥을 챙겨줄 때 주인집 막내딸이 항상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우리 살림도 넉넉지 못한데 그래도 안 줄 수는 없었다. 똥은 옆에 놔두고 먹어도 사람은 못 한다는 말처럼 늘 그 아이를 우리 아이 먹을 때마다 챙겨주었다.
주인아저씨는 지방에 내려가 있으면서 노가다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부부가 가끔 무섭게 싸웠다. 맨발로 문밖으로 뛰쳐나가 대문을 뛰어넘어 들어오기도 하고 정말 부부싸움이 요란했다. 아마 월급에서 술이라도 사 먹고 펑크가 나면 그렇게 심하게 싸우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뿐 아니라 어느 날 밤은 또 다른 부부싸움으로 잠까지 깨게 했다. 이래도 저래도 참 민망한 노릇이었다. 아는 척은 할 수 없었지만 다 큰아이들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둘째를 낳고 얼마 뒤 남편은 이사하자고 했다. 서울에서는 집을 사기 어렵고 부천에 아파트를 사자고 했다. 그때 우리 집 전세금이 130만 원이었다. 13평짜리 주공아파트가 290만 원인가 했다. 남편 지인 강 정렬 씨가 아시아신협 총무였는데 자기 이름으로 신용협동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주어서 부천 원미동 원미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생각도 못 했던 우리 집이 생겼다. 이사하던 날 막 제대를 한 다섯째 오빠는 이른 아침 이사를 도와주러 오고 집을 장만했다는 소식에 친정엄마는 호수도 모른 채 시루떡을 해 가지고 와 아파트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갚아야 할 대출금은 많았지만, 셋방살이 탈출을 할 수 있었다.
아! 아! 아!
나는 아이들과 안방에 앉아 천장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 집이다! 우리 집이야!)
연일 장맛비가 내린다.
우리 집은 부천 원미동으로 이사 온 후 두 번 더 이사했다. 큰아이가 졸업 후 남중학교로 배정되어 살던 집을 팔고 전세로 방이 하나 더 있는 20평으로 이사를 왔다. 명문 부천고등학교에 가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집을 팔고 전세를 사니 해마다 주인은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했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있었다. 역시 남의 집은 불편했다. 집세를 언제 올려 달라고 할지 모르고 언제 이사를 하라고 할지 모르고 잘못하다간 전세금까지 날아갈지도 모르고. 그때 마침 친정아버지가 잡아 주신 논 8마지기인가가 서해안 고속도로로 들어가 보상금 받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1억 2천인가를 받아 은행에 정기예금을 넣었는데 이자만 100만 원이 넘게 나오고 있었다.
둘째 아이가 부천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아예 학교 뒤로 이사를 했다. 31평이지만 방이 네 개다. 안방에다 남편 서재를 꾸며 쓰게 했다. 3면벽을 책꽂이를 주문 제작하고 백화점에 가서 장인이 만들었다는 앉은뱅이책상도 사서 방가운데 들여놓고 창문가에는 문갑도 놓아주었다. 남편의 꿈이 이루어지고 아이들도 방을 하나씩 가질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제 보금자리를 마련해 다 떠났다. 대신 동네 아이들이 찾아와 제집처럼 뒹굴면서 남편에게 오는 책들을 보며 지낸다. 손주보다 자주 찾아오는 동네 강아지들이다.
옆 라인 403호에 사는 영철이 엄마가 한 번은 우리 집에 방문하곤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강정규 선생님이 왜 이런 집에 사세요?”
“왜요? 정원이 몇 평인 줄도 모르고 사는데요.”
“저게 사유지세요.”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송내공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에서 관리해주니까 더 좋지요. 정원사도 몇 명인지 모르는데.”
사람들은 이름난 글쟁이들은 엄청 돈을 많이 버는 줄 아는 모양이다.
이문구 선생이 말년에 위암 투명하면서 부천작가회에 와서 한 말이 생각난다.
“작가라고 은행에 가서 말하고 돈 달라고 말해봐요. 만원도 못 빌려요.”
그러면서 어려운 작가 돕기 운동을 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작년 가을 남편의 고향이기도 하고 대표작 『다섯 시 반에 멈춘 시계』 모티프가 된 대천 해수욕장엘 갔었다. 그 재래식 화장실 자리에 문학관은 지었지만 정작 이문구는 없었다. 자료를 다 넘겨주었는데 가족들과 이견이 생겨 부인이 주었던 자료를 다 가지고 와버렸다고 한다. 그곳에 알지도 못하는 작가 사진만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이문구 문학관도 못 만들었는데요.”
돌아오는 길, 문화 해설가가 안타깝고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렇게 50년 세월이 흘렀다.
지난 화요일 부천 책 문학센터에 ‘강정규 자료실’이 개관되었다.
전날 저녁 남편은 큰아이 그림으로 만든 엽서에 메모했다. 내일 개관식에서 할 인사말이라고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부천시에 40여 년 거주해 온 강정규입니다.
여기 전시된 자료는, 저의 개인 창작물, 소설 동화집 등 50여 점과 제가 그동안 소장해 온 인문학 서적 5천여 권 가운데, 시립도서관 사서분들이 선별한 개인 창작물 50여 점과 인문학 서적 900여 권입니다.
부천시민의 한 사람으로, 이처럼 귀한 공간을 할애받아 특혜를 입은 것 같아서, 한편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같은 길을 걷는 후학들에게 자극이 되길 바라며, 여기까지 오는데 애쓰신 시립도서관 관계자 여러분과 조용익 시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인사말은 하라고 해 놓고 내빈 소개할 때 인사만 시키고, 정작 왜장을 치는 사람들은 국회의원, 시의원, 무슨 무슨 위원장들이었다.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 그렇지 …”
누군가 뒷다마를 깠다.
‘잘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넓은 정원을 주시나!’
신의 한 수를 두었다는 거실 소파에 앉으면, 저만치 성주산이 한눈에 보이고 눈앞에 송내공원이 초록초록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