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국어국문과 입학
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해 몇 번이나 올까?
7. 국어국문과 입학
그즈음 나는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의 꿈을 가진 건 아니었고 집에 오는 남편 손님들 접대하며 귀동냥으로 얻어듣다가 부천 문단에서 작가의 가족 글도 실리니까 글을 한편 내라고 했다. 그때 낸 수필 제목이 “황금 웃음‘인가 그랬다.
그때 남편은 자신의 소신을 굽힐 수 없다며 짐을 싸 들고 집으로 왔다. 신문사 퇴직을 하고 나니 집에 돈 버는 사람은 없었고 미술공부 하는 큰아이 고3을 앞둔 작은 아이. 겉으로 표는 안 냈지만 막막했다. 식구들이 나가고 혼자서 앞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때마침 신학교 동창생 한 사람이 영국에 가서 학위를 받고 귀국해 일산 정발산 아래 개척을 한다고 했다.
내가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해 온 것을 아는 그 사람은 목회하는 데 도와 달라고 간청을 했다.
별은 멀리서 봐야 반짝인다고 남편의 고등학교 후배이고 학교 다닐 때 가깝게 지냈는데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좋은 관계에 금이 가는 건 아닐까 예견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청의 거절하기 어렵고 난 유학도 못 가고 아이들 뒷바라지와 교회 일로 탈진된 상태였는데 향기 나는 곳에 가까이 있으면 향기가 배듯 독일에서 석사,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과 같이 동역하다 보면 자연스레 얻어지는 것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고심 끝에 동역하기로 했다.
정발산 2층 건물에 개척해 대화역 성당 옆에 교회까지 지었다. 목사 명성을 듣고 원근 각처에서 교인들이 왔다.
그즈음 나는 복사골문학회에서 수필공부를 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고 글쓰기 공부를 하는 것도 기대가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합평회를 했고 시시때때로 친목도 다졌다. 앞으로 글을 쓰려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이도 있고 하는 일도 있고 그래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입학을 했다. 신학교 졸업을 했으니 편입을 할 수도 있다고 했으나 기초부터 배워야겠다는 마음으로 1학년부터 시작했다. 생각보다 공부할 양이 많았다. 영어, 한문, 문화사, 컴퓨터의 이해 등등 한 학기에 6~7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리포트도 많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도 만만치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리포트를 쓰고 식구들 식사 준비를 해놓고 교회 출근을 했다. 영등포까지 전철을 타고 87번 버스를 갈아타고 일산 대화역에서 마을버스를 타던지 20여 분 걸어야 했다. 오가는 출퇴근길이 공부하는 시간으로 활용해 테이프를 들었다.
큰아이가 미술공부를 위해 영국에 나가 있었고 작은 아이는 연대를 다니고 있었다. 집에 대학생이 3명인 셈이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잡지를 발행준비를 하던 때였다. 쉬는 날은 이웃 아이들을 모아 글방을 하고 교회는 일주일에 4번 출근을 했다.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듯했다. 매달 큰아이에게 보낼 돈도 만만치 않았고 작은 아이도 아르바이트하며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를 했지만 나 혼자 집안 경제를 감당하기는 버거운 일이었다. 1999년 입학해 2022년 졸업을 했다. 열심히 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미련스럽게 한 것 같아 아쉬움도 남는다.
달리는 차 안에서도 자면서도 집안일을 하면서도 테이프를 틀어 놓고 살았다. 그야말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또 들었다. 시험 때는 모범 답안을 만들어 녹음해서 수십 번 반복해서 듣곤 했다. 그렇게 졸업을 했다. 남은 건 공부 살 이다. 4년 동안 10킬로가 늘었다. 몇 킬로가 더 나가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외모보다는 내면이 더 중요하지 라는 생각이 나의 지론이었다.
복사골문학회 모임도 수필에서 동화로 바꾸었다. 오래 글을 쓰려면 수필보단 동화가 더 날 것 같아서였다. 남편이 지도하는 동화 모임으로 갔다. 그 모임은 오랜 친분으로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들이었지만 한편 편하지 않은 면도 있었다. 글을 써도 남편이 이름이 난 사람인데 어디 응모하기도 어려웠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 남편에게 누가 될까 봐 등단하지 않고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고 했다.
교회에서 ’선교와 문학’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남편이 지도를 해주고 문학에 뜻을 둔 사람들이 모였다. 일산에 사는 사람들 부천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입소문을 듣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보에 나온 내 글을 보고 등단을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냥 쓰고 싶은 글 쓰고 싶어요.”라며 사양해왔다.
어느 날 저녁 양 권사가 전화했다.
한국교회 신보 신춘문예 수필을 응모해 보라고 했다.
일반문학이 아닌 기독교신문사니까 괜찮지 않겠냐고 설득을 했고 나도 수긍이 갔다.
그날 밤 내 컴퓨터에 저장된 수필 두 편을 골라 밤늦도록 수정을 했다. 내가 썼지만 잘 쓴 것 같았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내기로 했다. 그때 아차! 밤새 퇴고한 글이 날아갔다.
이를 어쩌지? 고민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동화습작 원고를 보냈다. ‘종 이야기’였다. 그것이 당선되었다.
‘저것이 커서 상을 타는구나!’
시상식 날 남편이 뒤에서 울었다고 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