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엄마 학생이 되다
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해 몇 번이나 올까?
4. 엄마 학생이 되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교복을 입은 여학생을 보면 한편 부럽고 또 다른 한편 자격지심이 들기도 했다. 공부한다는 것은 희망일 뿐 현실은 녹녹지 않았다. 그러다 가난한 집 팔 남매의 맏며느리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매우 곤란한 삶은 이어졌다.
원치 않게 어린 엄마가 되고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내가 설 곳이 없어 나 스스로 교회를 다녔다. 집에서 20여 분쯤 되는 교회를 작은 아이는 업고 큰아이는 손을 잡고 걸었다. 주일은 물론 수요예배, 금요예배 속회 모임, 열심히 새부천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의 기쁨을 느끼던 때였다. 하나님에 대하여 궁금한 점도 많아졌다. 신학 공부만 하면 궁금한 점을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님,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내가 처해 있는 형편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내 나이 스물일곱, 꿈처럼 나의 기도는 이루어졌다. 꼭 10년 만의 일이다.
학교에 가려면 원미동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청파동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여기를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편이 학교를 데리고 가던 날 한 말이었다.
먼 거리도 늦은 저녁 시간도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온 세상이 그야말로 사랑이었다. 부천역 북부 관장을 걸어가다 보면 온 세상이 햇살 가득한 환한 세상 같았다. 학교에 가면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도 대단해 보였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하고 함께 공부할 수 있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즈음 큰아이는 초등학교를 입학을 해야 하고 작은 아이는 다섯 살 한참 엄마 손이 필요한 때였다.
“네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
시어머님은 내가 공부할 수 있게 아이들을 강원도로 데리고 가 보아주겠다고 하셨다.
큰아이는 동송초등학교로 입학을 시켰고 작은 아이도 함께 내려가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만나러 강원도 시댁에 갔다. 아이들과 헤어져 돌아올 때는 아이들도 울고 나도 울었다. 아이들이 없는 집은 빈집 같고 견디기 힘들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할머니네로 살러 간 아이들은 두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내가 저녁에 학교에 간 사이 아이들이 문제였다. 저녁밥도 먹여야 하고 작은 아이는 다섯 살, 화장실 문도 잘 여닫지 못하는 상태였다. 얼마간 친정 여동생이 돌봐주다, 아는 아주머니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내가 가르치는 교회 학생에게 아르바이트를 시키기도 하면서 손꼽아 방학을 기다렸다.
“엄마 언제까지 학교에 다녀야 해?”
큰아이가 물으면 나는 졸업 때까지 연수를 말하지 못하고 항상 그 학기 방학 때로 대답했다.
신학교는 공부할 것도 많았다. 히브리어, 헬라어, 대학영어 그리고 조직신학 등등. 달리는 지하철은 공부하는 장소가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가려고 머리를 빗는데 정수리 부분에서 머리가 한 움큼 뚝 떨어졌다. 원형탈모였다. 열심히 다니던 아기 엄마가 신학교를 다닌다고 하니까 교회에선 신앙이 대단한 줄 알고 많은 일을 맡겼다.
교회학교 교사, 중. 고등부부장 속장 등. 나는 때마다 감사함으로 순종했다. 그러다 보니 할 일은 더 많아졌다. 그래도 교회 일이 항상 먼저였다. 주일학교는 행사도 참 많았다. 여름성경학교. 중.고등부 수련회, 문학의 밤 등. 교회 일들에 묻혀 살다 보니 정작 집 식구들을 돌볼 시간은 늘 부족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어느 때인가 아이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큰아이가 뭐라 하니까 작은 아이가 대꾸했다.
“교회는 내가 더 많이 갔다. 엄마 찾으러.”
토요일 저녁 학생부 모임을 하는데 작은 아이가 울면서 엄마를 찾아왔다.
함께 안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본 학생들이 “선생님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내가 실력이 있어서 고등부 담당을 한 것이 아니라 문제아들이라 생각하고 아무도 이 아이들을 맡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때 만나던 학생들이 지금은 환갑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 그 마음으로 카톡방에서 소식을 전하며 지내고 있고 어떤 때는 느닷없이 찾아와 맛집에서 맛난 밥을 사주기도 한다. 교회의 미쳐서 제대로 못 돌보던 우리 아이들도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지금 제 몫을 감당하는 건 ‘ 세상에 공짜는 없다.’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할머니 댁에서 살다 온 작은 아이는 남의 집에 안 가고 싶어 했다.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은데.”
어쩌다 친척 집에라도 놀러 가라 하면 작은아이가 하는 말이었다.
늦은 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은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들어있었다. 꾀죄죄한 얼굴로 잠든 모습을 보면 안쓰러웠다.
‘힘든데 학교 그만두지.’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있던 남편은 그 말을 할만도 한데 “고단할 텐데 어서 자!”라고 하였다.
학교 가는 길은 이쪽도 저쪽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평소에는 지하철 안에서 공부를 하고 시험 때는 학교도서관에 가서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와! 집사님 한자리에 꼬박 8시간을 앉아 공부하시데요. 왜 집사님이 장학생 못하는지 모르겠네요.”
같이 공부하는 전도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집사님 보면 장가 못가겠어요.”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 때문에 늘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드디어 졸업했다.
그즈음 목사님, 장로님들이 우리 집에 심방을 오셨다.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자고.
“나는 목회를 하려고 신학 공부를 한 건 아닙니다. 그냥 공부가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정중히 사양했다. 나는 평신도 봉사가 더 부담 없고 좋았다.
그즈음 교회에서 함께 동역했던 부교역자가 부천역 근처에 개척을 했다. 감리교회에서는 3년 단독목회를 해야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사는 원미속이 개척을 따라나섰다.
“문 집사가 있으니 안심이 된다.”
담임목사가 말했다고 한다. 재미있게 교회가 모일 때 친구 목사에게 넘겼다.
더 그 교회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