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능곡재건학교 입학하다
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해 몇 번이나 올까?
2. 능곡재건학교 입학하다
막상 졸업하고 나니 중학교에 못 간 것이 더 실감 났다.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그즈음 산뒤마을에 사는 방물장수 아주머니가 왔다. 그 아주머니는 보따리를 이고 다니면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주로 옷을 팔았다. 안방 가득 물건을 펼쳐 놓고 동네 아줌마들이 구경하고 물건을 사고 곡식으로 주로 물건값을 대신 받아가는 사람이었다.
“분이는 얼굴이 하야서 뭐든지 잘 어울린다.”
이것저것 입혀보며 칭찬도 해준 적이 있어 안면이 있다. 하지만 그날은 옷 같으건 안중에도 없었다.
“분이도 중학교 갔지? 우리 동네 아이들은 삼거리에 재건학교가 생겼는데 죄다 거기로 갔어.”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 핵교는 돈 없어 중학교 못 가는 아이들 공짜로 가르쳐준다고 하더라.”
옷 장사 아줌마가 다녀간 후 날마다 졸랐다.
“엄마 나 중학교 다니고 싶어요. 삼거리 학교라도 보내 주세요.”
“너를 돈이 없어 못 보낸 게 아니잖니? 엄마가 바쁘니까 네가 집안일을 거들어 달라는 거지.”
엄마도 끝내 거절은 못하고 마지못해 승낙했다.
나는 손수 입학원서를 들고 학교에 갔다.
학교 옆 작은 건물을 숙직실로 쓰고 있었는데 서무선생님이 입학원서를 받았다. 그 방안 가운데 무쇠 난로가 있었고 찌그러진 노란 주전자에선 김이 폴폴 내뿜고 있었다. 그 옆에는 군복에 까만 물을 들여 입고 베레모를 쓴 사람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해 그 분이 국어 선생으로 서울에서 내려왔고 나는 입학을 한 것이다.
중학교에 갈 수 없어 실의에 빠져있던 나는 물고기가 물은 만난 것처럼 좋았다. 초등학교와는 반대 방향으로 십여 리를 걸어 다녀야 했다. 마을에서 걸어 나오면 버스도 다녔지만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그때는 대부분 걸어서 학교를 함께 몰려다녔다. 학교 가는 길 이웃 아이들과 마주쳤다. 아이들은 군자중학교로 가고 나는 능곡재건학교로 갔다. 정규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단어도 외우고 많은 숙제도 밤늦도록 꼬박꼬박해갔다. 아침 일찍 가서 화단도 가꾸었다.
이런 나를 교무실에서 내다보던 국어 선생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저 아이는 내 인생에 특별한 영향을 줄 사람이구나!’
수업시간에도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다. 월요일 첫 시간은 전교생이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 성경공부 시간도 있었다. 그때 안산교회 담임이 김진호 목사였는데 영어를 가르쳤다. 예배시간 그분의 설교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 목사님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며 말씀이 의심스러울 때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학교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내가 숙제를 하거나 책을 보면 늘 욕이 날라왔다.
“계집애가 일사를 잘 배워 시집을 가야지. 시집가서 책이나 떡 피고 앉아 있을 거냐? 누구 욕을 먹이려고 저 모양이냐?”
이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엄마는 길을 막았다.
“오늘은 일이 바쁘니깐 학교 가지 말고 집안일을 거들어라.”
“…….”
나는 학교를 빠지고 싶지 않았다. 빠지면 진도를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수학 과목).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밥을 짓고 밤이면 앉은뱅이책상 속으로 기어들어 가, 책으로 등잔불을 가리고 숙제도 하고 책을 읽었다. 한밤중 대청마루에 오줌을 누러 나온 엄마는 귀신처럼 불 켜놓은 것을 알아차렸다. 돈도 못 버는 계집애가 석유 달리고 있다고 또 욕이 날아왔다.
‘다른 집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해서 혼이 난다는데…….’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공부 욕심이 많은 나는 아침이면 집 안 청소를 하고 도망치듯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오면 인정머리 없는 계집애가 학교에 갔다고 또 욕을 해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교에선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은 성경 시간 점수를 더 준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 교회까지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엄마의 잔소리는 더 심해졌다.
어느 날 엄마는 교회를 못 가게 하려고 하나밖에 없는 운동화를 뜨물통에 집어 던졌다. 그때 나는 고무신을 신고 교회에 갔다. 이래저래 엄마와 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않을 거야.’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엄마는 학교에 다니지 말고 집안일을 하라고 했고 나는 고집을 부리며 학교에 다녔다. 도시락이 없어 점심은 거를 때가 더 많았다. 점심시간에 국어 선생님이 빌려준 책을 읽곤 했다. 책 읽는 습관이 그때 들여졌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책을 안 읽으면 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 경로(敬老)가 지나도 아이들과 만나 독서 지도를 하는 일은 내가 천성으로 좋아하는 일인 것 같다.
1학년 학기 말 70여 명 중에 2등을 했다. 우리 반에서 천재 소리를 듣는 차근유라는 남학생이 일등을 했다. 등수에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근상과 우등상을 타니 기뻤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부모님께 자랑스레 보여 드렸겠지만 나만 졸업 통 속에 돌돌 말아 넣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