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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이령 Sep 27. 2023

호학(好學)일지

3. 흔들리며 피는 꽃

호학(好學)일지     

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해 몇 번이나 올까?




   3. 흔들리며 피는 꽃




 2학년 되면서 여학생들 사이에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국어 선생님과 내가 연애를 한다는 거였다. 친구한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걱정하였던 것은 억울하다는 생각보다 선생님이 이런 소문을 들으면 순수하지 못한 여학생들에게 얼마나 실망을 하실까였다.

  여학생들의 시새움, 엄마의 구박 그것보다 더 걱정되는 건 나 때문에 선생님께 누를 까치게 될까 말 못 할 고민이 커갔다. 소문은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다. 2학년 담임 노처녀선생이 제일 색안경을 쓰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3학년 중간고사를 본 후, 같은 반 친구 헌숙이를 따라 구로공단 가까운 산동네로 교복을 입은 채로 왔다. 다음 날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옆방 아가씨를 따라 구로공단에 가발공장 시다로 취직을 했다. 친구 엄마는 삼 남매를 키우며 과부로 살았는데 나는 그 식구들과 한방에서 지냈다. 공장에서 돌아오면 저녁밥을 지었고 이른 아침이면 물지게로 물을 길어오고 출근을 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물지게를 지고 언덕을 올라오면서 울었다.


  “분이 씨는 마음이 여린가 봐요?”


  옆방에 세 들어 사는 총각이 나를 보고 말했다. 

  산동네에서 독산동까지는 꽤 멀었다. 야근이라도 하게 되면 밤길을 혼자서 걸어와야 했다. 엄마와의 갈등과 여학생들의 입소문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학업을 중단한 아쉬움에서는 헤어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은 학교에 가 있었다. 시간마다 교실 풍경이 떠 올랐다. 점심시간이면 친구들과 뒷동산에 올라가 앉아 있던 모습도 떠올랐다.

  두어 달 때쯤 지나니 계절은 여름으로 바뀌어 갔다.

  수도시설도 없어 아랫마을에 가서 물지게를 져다 밥을 해 먹고 쌀 씻은 물로 설거지하고 일요일은 멀리 개울가에 가서 밀린 빨래를 해와야 했다. 그래도 헌숙이네 집은 주인집이었다. 

  그 집에는 서너 가구가 세 들어 살았는데 저녁이며 주인집 마루에 모여와 텔레비전을 봤다. 주인집만 티브이가 있고 다른 집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세 들어 사는 사람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도 박치기왕 김일이 레슬링을 할 때는 다 몰려와 안마당에까지 서서 경기를 보곤 했다. 

  그때 나는 구세주 같은 사람을 만났다. 안양에 있는 산업신문사 기자였다.  그 사람은 나에게 신문사 사무실에 와서 일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고등학교를 보내 주겠다고 했다. 앞뒤 잴 것도 없이 다니던 가발공장을 그만두고 그 신문사로 직장을 옮겼다. 내 힘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컸다. 얼마 안 있으면 고등학교도 진학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부푼 꿈을 안고 출근을 했다. 

  학교만 다닐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신문사 일은 기자들이 취재 나가고 나면 사무실에서 전화 받고 사무실 지키는 일이니 공장 다니는 것보다 좋은 환경인 것 같았다. 

 이웃에 사는 기자는 저녁이면 자기 방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친구와 같이 몇 번 놀러 간 적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 남자는 늑대의 발톱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다른 사람이 없을 때는 느닷없이 포옹을 하기도 하고 저녁이면 자기 방에 놀러 오라고 했다. 안가면 다음날 출근하면 사람들이 없을 때 화를 냈다.


  ‘급사로 오면 고등학교를 보내 준다고 해 뛸 듯이 기뻐하며 왔는데…….’


  그야말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한 것 같은 심정이었다. 

  집을 나왔고 학교도 자퇴했고 다니던 공장도 퇴사를 했는데, 그렇다고 이 유혹자와 함께 있을 수도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만둔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신문사 사무실을 나왔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직장도 안 나가면서 친구 집에 그냥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방을 싸서 집으로 내려왔다. 여름 휴가를 왔다고 했다. 집으로 오니 전에 있던 일들이 재현되었다. 학교는 자퇴하였지만, 소문의 입방아는 멈추지 않았고 엄마의 성화는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해 가을 10월 18일, 나는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상경했다. 못 가게 잡는 엄마도 뿌리치고 처음 본 할머니를 따라 버스를 타고 오면서 그토록 좋아했던 학교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안녕을 했다. 존경하는 선생님도 안녕, 시샘하던 친구들도 안녕을 하고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2년 동안 일을 하면 방을 하나 얻을 만큼 자금이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인아주머니는 월급을 적금으로 넣어 주겠다고 했다. 그해 겨울을 힘겹게 지냈다. 물질을 많이 해서인지 손가락마다 습진이 생겼다. 

  명절이 되었다. 집에 내려갈 수가 없었다. 집에 가면 붙잡힐 게 될 거고. 마음이 힘든 것보다는 몸이 힘든 것을 택했다. 

  어느 날 둘째 오빠가 전화했다.

  명절에 왜 안 내려왔느냐고. 할 말이 없었다. 

  며칠 후였다. 오빠가 느닷없이 나를 데리러 왔다. 겨우내 고생만 하고 다시 도루묵이었다. 겨우내 고생만 하고 빈손으로 오빠를 따라 울면서 집으로 왔다. 

공장에 다닐 때도 친구 엄마는 밥값도 받고 계를 하자면서 곗돈을 부라고 했다. 몇 달 붓고 집에 오면서 돈 이야기를 하니까 나도 계가 잘못되어서 손해를 많이 봐서 줄 수가 없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고생만 하고 그냥 가느냐고 울었더니 그건 이 집 처분만 바라라고 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외출중이어서 인사도 못하고 그 집에서 나왔다.

  오빠한테 끌려 강제로 집에 왔지만 나는 트렁크를 풀지 않은 채 집을 떠날 생각을 했다. 이번엔 기숙사가 있는 한독산업으로 갔다. 그곳은 국어 선생님 집안 아저씨가 상무로 있는 곳이고, 재건학교 졸업생들이 많이 와 있었다.

  열일곱살의 봄부터, 결혼하기까지 3년쯤 되는 시간 나는 세상 바람에 흔들리면서 오물 덩어리처럼 뒹굴면서 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런 일이 있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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