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남들 다 가는 중학교도 못 갔다.
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해 몇 번이나 올까?
1. 나는 남들 다 가는 중학교도 못 갔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산모양이 우산처럼 동네를 품어 주는 모양을 하고 있어 우산이 마을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넉넉한 우(優) 자를 써서 산이 많은 동네라는 뜻이라 했다.
한양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조상님은 세상 사람들 사는 모습이 싫어 식솔들을 데리고 우산이 마을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나라님이 높은 벼슬을 내렸는데도 ‘그까짓 거 하느니 안 하다.’ 며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유복자로 부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가장 노릇을 하느라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셨다. 그런데도 그분은 암산 실력도 놀랍고 말씀하실 때마다 문자를 쓰셨다. 평생 글을 몰라 한(恨)을 갖고 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이 친정아버지에 대하여 말할 때는 『큰 바위 얼굴』 나오는 어니스트 같은 분이라고 하였다.
아버지 20세 어머니 17세 비슷한 형편에서 두 분은 혼인하고 10남매(딸 둘은 어려서 잃었다 함)를 한 해 걸러 낳으시며 살림도 일구셨다. 아무것도 없는 맨주먹으로 나무해서 송아지 사고 정성껏 키워 어미 소 팔아 땅 장만을 하는 식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를 하셨다. 논도 몇십 마지기 밭도 몇천 평 그리고 산도 장만하고 동네에서 하나밖에 없는 기와집도 지으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부잣집 고명딸 소리를 들었다.
오빠만 다섯 또 남동생, 그러니까 나는 남자 형제 틈에서 할머니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할머니는 내 간식거리를 늘 챙겨주시고 옆에 끼고 사셨다. 밥 먹을 때도 할머니와 아버지상에서 함께 먹고 저녁에 잘 때도 할머니는 나를 안고 주무셨다.
내가 아홉 살 때다. 또래 친구들은 벌써 작년부터 학교에 다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입학통지서가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떼를 쓰는 나를 데리고 둘째 오빠가 학교에 갔다.
“분이야, 학교에 다니고 싶니?”
교무실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물었다.
“…….”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나는 고개만 끄떡였다.
오빠는 나를 데리고 소아청소년과 병원으로 갔다. 의사에게 만 6세가 된다는 진단서를 끊고, 그때야 출생신고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우푼 일이 생긴 것은 아버지가 나를 낳았을 때 출생신고를 동네 이장한테 부탁했다고 한다.
“동짓달 열하룻날 우리 집에 딸을 낳았다네. 장에 가는 길에 면사무소에 들려 출생신고 좀 해주게 나. 이름은 영분이라 해주게.”
“알았네. 나중 술이나 한잔 사게.”
흔쾌하게 대답한 이장은 장에 가는 길에 까맣게 잊고 9살이 되도록 출생신고도 안 하고 있었던 거다. 문맹 아버지를 둔 덕에 나는 지금까지 주민등록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르다. 거기다 이름도 집에서는 영분이 학교에는 영숙이라고 불렀다. 아마 오빠가 출생신고를 하면서 그렇게 올린 것 같다.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우산이 마을은 십 여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사람들이 네것 내것 가라지 않고 가족처럼 사이좋게 살았다. 아침이면 동네 아이들이 다 함께 모여 학교에 갔다. 산기슭 오솔길을 걸어 마을을 빠져나오면 ‘대장이 마을’이 나오고 거기부터는 차도 다닐 수 있는 신작로 길이었다. 초등학교까지는 십 리쯤 되는 거리였는데 걸어 다녔다. 돌아올 때는 끝나는 시간이 다르니까 혼자서 오는 날이 많았다. 학교는 5일 장이 서는 도일시장 가까이 있었고 문방구에는 신기한 것들도 많았다. 신앙촌 카라멜를 한 통 살 수 있는 날은 한 알씩 녹여 먹으면 금세 와졌다.
그즈음 둘째 올케언니가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살았다. 언니는 전쟁고아였는데 이웃집 할머니 댁에 와 있다가 오빠와 눈이 맞아 연애를 걸었다고 했다. 그 집 ‘여우 할매’는 어느 날 저녁 언니에게 보따리를 하나 안겨 대문도 아니고 사랑방 미닫이문을 통과해 안방 뒷문으로 들어왔다. 밤중에 부모님께 큰절을 시켰다. 엄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 내어 깔깔 웃었고 아버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얼떨결에 큰절을 받으셨다.
이날부터 엄마와 새언니의 불편한 동거는 시작되었다. 철없는 나는 언니가 그냥 좋아 졸졸 따라 다녔다. 언니와 오빠가 자는 건넌방에서 함께 잠도 자고 부엌에 들어가 같이 있었다.
“언니 일 좀 거들어라.”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언니는 손사래를 치며 따뜻한 부뚜막에 나를 앉혀놓고 놀게 했다.
“아기씨, 그냥 여기 앉아 있어요. 지금 일 안해도 나중에 시집가면 실컷 해요.”
언니도 나를 진심으로 아꼈다.
재봉틀로 손수 주름을 잡아 주름치마를 만들어 입히고 날마다 머리도 양 갈래로 땋아 학교에 보냈다.
“너는 어쩜 그리 예쁘게 차려입었냐?”
어느 날 노란 스웨터에 흰 치마를 입고 친구를 기다리는데 옆 반 선생님이 칭찬해주셨다.
어쩌다 심통이 나서 아침밥을 안 먹고 학교에 가면 점심때쯤 둘째 오빠가 데리러 왔다. 문방구에서 크림빵을 하나 사서 먹이고 버스를 태워 집에 데리고 왔다. 둘째 오빠 부부는 부모님 대신 학교숙제도 봐주고 받아쓰기 연습도 시켰다.
“우리 분이가 공부를 잘해서 기특하다.”
오빠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를 귀애하던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 오래 앓으시다 돌아가셨는데 언니가 그 자리를 메꾸어 주었다. 어쩌다 보니 할머니와 엄마, 엄마와 올케언니의 묘한 불편한 사이에 내가 끼어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2학년 가을 꽃상여를 타고 선산으로 가시고 언니는 오빠가 제대하면서 세간을 났다. 엄마는 언니가 하던 집안 살림과 농사일까지 하게 되었다. 든 자리는 안 나도 난 자리는 표난다 말처럼는 하루 아침에 엄마 일이 많이 졌다. 일에 지친 엄마는 화가 나면 나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이년아, 너를 중핵교를 보내 주나 봐라!”
엄마에게 그 말을 들을 때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중학교도 못 가는 데 공부는 해서 뭐하나?’
그야말로 낙심이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반이 60명쯤 되었는데 중학교를 못 가는 사람은 집이 몹시 가난하다는 남자아이 한 명과 나 둘뿐이었다. 그 시절에는 중학 입학시험을 봐야 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공부해서 중학교 가겠냐?”
담임선생님이 성적이 안 좋은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손바닥을 때렸다. 그때 나도 거기 끼어있었다. 선생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갔는데 그곳에 있던 선생님이 물었다.
“너희 오빠는 대학까지 보내 주면서 너는 왜 중학교도 안 보내 주니? 너도 중학교 보내 달라고 해라.”
담임선생님도 아닌데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걸핏하면 “이년아, 너를 중학교를 보내 주나 봐라.”라는 말을 귀에 익히 들어서 그런지 그 말에 너무 낙심되어서 그런지 “나도 중학교 가고 싶어요.”라고 말대꾸를 한 기억도 없다.
초등학교 졸업식 즈음 군자중학교에서 예비 소집일이 있었다.
‘나는 여기 다닐 것도 아닌데 …….’
아마 담임선생님도 거의 모든 아이가 입학하니까 단체로 보낸 것 같다. 운동장에 서서 중학 생활에 대한 안내를 받으며 서 있던 내 모습이 잘 기억도 안 나지만 생각만 해도 참 안쓰럽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엄마, 졸업식에 오시니?”
“못 오실 거에요.”
학교 앞 문방구 집 단짝 친구 경애 엄마가 빨간 졸업 통을 선물로 사주셨다. 중학교도 못 가고 졸업식에 엄마도 안 온다니까 선물을 사주신 것 같다. 뜻밖에 엄마는 졸업식에 오셨다. 구령대 앞에서 엄마는 한복을 입고 나는 노란 스웨터를 입고 찍은 사진이 지금도 앨범에 끼어있다.
그날 친구들은 모두 중학교로 교과서를 받으러 갔다. 나는 졸업 통에 졸업장을 말아 들고 걸어서 집으로 왔다. 엄마하고 왜 같이 안 왔는지 모르겠다. 신작로 길을 울면서 터벅터벅 걸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