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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이령 Sep 27. 2023

호학(好學)일지

5. 검정고시학원, 6.이화여대 평생학습원

호학(好學)일지     

문이령 (moonys99@hanmail.net)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해 몇 번이나 올까?




5. 검정고시학원



  신학교 다닐 때부터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검정고시학원에 다녔다. 신학교는 어렵게 마쳤지만 왠지 벽돌을 쌓다 중간을 빼먹고 쌓은 것 같아 영등포에 한림학원을 찾아 검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동창생들은 개척하고 목회자로서 일을 시작하는데 나는 고검 준비를 했다. 그해 8월 고검에 합격하고 다음 해 4월 대검을 했다. 같이 공부하는 학원생들을 대부분 청소년이었는데 서른이 넘은 아줌마인 나는 당연히 남의 눈에 띄었다. 왠지 부끄럽기도 했다. 영등포지하도를 다닐 때는 가방을 들고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엄마가 애들이야! 다른 엄마들은 학교 안 다니잖아?”


  큰아이가 볼멘소리로 툴툴거리기도 했다.

  남편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밥상위에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는 걸 보더니 “왜 초등학교도 다시 다니지?”하기도 하고 어느 일요일 보강을 들으러 가야 한다고 가방을 들고 나섰더니 “당신 좀 이상해!” 하면서 가방 안을 뒤져보기도 했다. 이웃 아주머니들이랑 교회 아는 사람들도 의아한 눈길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꼭 저렇게 해야 하나?’ 수근 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들한테 미안했지만, 나중에는 엄마가 공부하는 게 더 좋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1여 년 동안에 고검 대검에 합격하고 일반대학에 꿈을 가지고 입시학원도 얼마간 다녔다. 대학입시도 도전했다. 생각보다 높은 접수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졌을까? 시험을 보고 전철을 타고 오는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6.이화여대 평생학습원



 새부천교회에서 전임교육전도사 제의가 다시 왔다. 나는 감리교 신학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 것을 좋게 여겨서인지 지방회 때 남부지방회에서 파송 절차를 밟아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초빙했고 남편도 기꺼이 응낙했다. 


  “목사는 하지 마라. 어려워서 어떻게 사냐?”


  전도사 파송을 받고 온 나에게 농담 반 진담 반 한 말이다.

  늘 바쁜 일과였지만 목회자들이 쉬는 날이면 이화여대 평생학습원에 다녔다. 수강생들은 이대 졸업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방학 때면 장기 해외여행을 단체로 다니는 부유한 사모님들이었다. 그곳에서 동양철학 김흥호 박사 상담학 이근후 박사, 심리학 김태련 교수 등 귀한 분들의 강의를 들은 것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나와 비슷한 또래의 교수들 수업을 들을 때는 ‘ 저 사람은 무슨 복에 외국까지 다녀와 대학강단에 서나? ….’ 부자는 때깔부터 다르다더니 정말 그래 보였다.

  1988년 시작한 공부는 1998년까지 10년을 다녔다. 이대생을 못되었지만, 점심시간이면 아름다운 교정을 거닐고 배움에 목말라 있던 나는 단비를 먹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교양, 상담학, 독서지도사과정. 유치원 원장 교육과정 등 돌아가면서 수업을 하는 동안 조금이나마 눈을 뜰 수가 있었다. 

  교회 일은 끝도 없이 많았다. 교인이 많다 보니 주말에는 경조사까지 다녀야 했고 개인 시간은 물론 집 식구들 끼니도 챙겨주기 쉽지 않았다. 어떤 교인은 명절날 추도예배까지 봐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몸은 지쳐 탈진은 오고 어느새 우리 아이들은 고등학교 입학할 시기가 되었다. 

  나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교회 일은 평생 할 수 있는 일이고 아이 입시는 때가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부천고 입시를 두고 기도하며 쉬기로 했다. 그 결심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동안 학군 좋다는 잠실로 이사를 할 기회도 있었지만, 교회를 떠날 수 없어서 포기도 했고 나의 젊음을 다 바쳐 헌신한 이 교회를 떠나는 게 쉽지 않았다. 너무 버거우면 한 부서만 맡아서 하라는 절충의 제의하기도 있었지만, 사표를 내고 교인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돌아왔다.

  후임자가 불편할까 봐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보다 더 많이 지내던 교회를 안 나갈 수도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참된교회로 나갔다. 새부천교회는 모두 다 아는 사람이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낯설었다. 교회는 내 문제만도 아니었다. 우리 아이들도 엄마는 안 나가는데 아이들만 가는 것도 그렇고 딱히 다른 데를 나간 적도 없었다.

  영원히 있을 줄 알던 교회를 떠나니 모든 인간관계도 끝나는 것 같았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시를 시름 아팠다. 

  온 마음을 다해서 섬기던 교회를 떠나게 되니 허무한 마음에서인지 몸이 가라앉았다. 종일 누워 지내다시피 했다. 

  남편은 친구가 하는 한의원을 데리고 갔다.


  “너무 늦게 온 건 아니지?”


  남편이 물었고 한의사는 특별한 병명은 말하지 않았다. 

  약을 지어오고 얼마 후 압구정동  청학당 할아버지한테 식구들이 다 갔다. 

  “신랑을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야 했는데….”라고 하였다.

  새부천교회는 버스 한 번 타면 갈 거리인데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먼 거리가 되었다. 

  20~30년이 지난 지금도 첫사랑 같은 교회여서 그런지 거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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