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노동조합에서 편집국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자리를 맡게 되었다. 편집국이란 조합신문 발간에 따른 기사를 쓰거나 조합원 원고를 모아 소식지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런데 실상 자리만 편집국장이지 조합에서 신문이나 소식지를 발행하지 않아 편집과 관련한 업무는 할 것이 별로 없다.
지금껏 소식지나 신문 등 편집과 관련한 업무는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편집과 관련한 비슷한 것을 해본 것은, 직장에 들어오기 전 모 신문사에서다. 그것도 시험에 합격하고 발령이 날 때까지 임시로 했다.
신문사에서 편집국은 대단한 자리다. 신문사에서 편집업무는 경험과 실력을 갖춘 베테랑이 맡는다. 내가 모 신문사에서 일한 것은 기업에서 공고하는 재무제표의 한문 오탈자를 수정하는 작업이다.
이런 인연밖에 없는 내게 노동조합의 편집국장 자리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의 노동조합에서 편집국장 자리를 맡은 덕분에 조합을 들락거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직장인은 자신이 근무하는 조직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채널이 그리 많지 않다.
직장인은 조직 내부보다 오히려 조직 밖에 있는 사람에게 조직에 대한 정보를 듣거나 얻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의 대표성을 빌려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니 남들보다 조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다.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멋진 詩 한 수를 낭송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내가 근무하는 조직은 건설과 교통과 관련한 분야라서 부드러움보다 딱딱하고 건조한 업무를 주로 다룬다.
사람들은 건설과 교통 사이에는 詩나 문학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건설하면 흔히 막일이란 인식이 팽배해서 문학과는 거리가 좀 먼 업무로 치부해 버린다.
이번에 점심을 약속한 본부장은 지난해 점심시간에도 시를 읊조리는 모습을 보고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도 ‘저런 분이 계시는구나.’ 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첫인상은 중요하다. 첫 만남에서 식사 시간에 가슴에 품은 시를 꺼내어 낭송하는 멋진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공직의 특성은 어떤 모임이든 식사하는 자리가 생기면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대부분 선임자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말과 행동에 분위기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모임에서 주제를 정하지 않고 옆이나 앞에 앉은 사람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지위의 높낮이를 따져가며 나누는 수직적인 대화는 재미도 없고 분위기도 어색할 뿐이다.
우리나라 조직의 문화의 특성은 어떤 모임이든 대화는 선임자가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직의 선임자는 다양한 이야기와 정보를 갖고 있어야 모임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이끌 수 있다.
조직의 문화가 지위와 자리가 만들어 내는 꼴이다. 이런 문화에는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는 개별성의 총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리나 지위에 따라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점심시간에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본부장과 노조위원장이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 노조위원장이 본부장에게 詩 한 수를 청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본부장은 릴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하고 ‘가을날’이란 시를 읊조렸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 일 것입니다(릴케, 「가을날」).
詩 낭송은 눈을 지그시 감고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려야 묘미가 있다. 물론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가 청량하면 더 좋겠지만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 내어 읽으면 시에 대한 감상과 고즈넉한 소리를 통해 시구에 숨어있는 깊은 의미와 뜻을 음미할 수 있다.
그리고 시 낭송은 시에 대한 이해와 감상의 전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詩의 의미도 모르고 무조건 시구만 외워서 낭송하는 것은 죽은 시어를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것에 불과하다.
시 낭송은 시구의 뜻을 천천히 음미하며 분위기에 맞추어 낭송해야 한다. 장소가 어디든 시를 낭송하는 분위기에 취하면 봄날 눈 녹듯이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런 분위기에 취해 사랑, 슬픔, 이별, 서정 등과 같은 감정을 이입시키면 시적인 분위기에 빠져든다.
본부장은 詩를 낭송하기 전에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준 종자기에 대한 知音의 유래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노라니 점심시간이 마치 카페에 앉아 문학 수업을 듣는 기분이다.
사람은 가슴에 품은 詩 한 수를 꺼내어 낭송할 줄 알아야 한다. 대중가요도 천천히 읽으면 좋은 시구로 다가온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청춘 시절에 반했던 詩 한 수를 품속에서 꺼내어 큰 소리로 읊어보자.
문학은 생활이지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밥상이 아니다. 문학적인 향기와 분위기를 유도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삶이 부드럽고 마음도 밝아진다.
물론 詩 한 수가 인생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번쯤 빠져보고 싶은 대상이 詩의 세계다.
하늘이 높고 푸르른 날에 모처럼 점심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식사를 함께 나눈 직원의 얼굴 모두는 기억할 수 없지만, 점심시간에 시나 소설이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며 식사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점심시간에 본부장이 낭독한 詩에 대한 화답 차원에서 나도 가슴속에 저장해 둔 詩 한 수를 꺼내어 천천히 읊조려본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맑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광섭, 「저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