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퇴근해 저녁을 먹는데 아내가 “여보! 글쎄 큰 애가 집에 들어오는데 아파트 단지에서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는 아가씨를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의 물을 질질 흘리는 모습이 꼭 아빠를 보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아내의 말은 시쳇말로 그 아저씨와 내가 좀 바보같이 멍청해 보인다는 의미다. 결혼 전에는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살았는데, 결혼 후에는 자주 듣는 편이다.
아내가 멍청하다고 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멍청하다’란 ‘아무 생각 없이 멍한 상태로 있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사전의 의미를 새겨보니 아내가 하는 말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최근에 기억력이 감퇴되면서 무언가를 자주 잊어버린다. 사무실에 근무할 때도 일이 있어 옆 사무실 직원을 만나러 가다 도중에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할 말을 잊고 그냥 사무실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사무실에 앉아 한참 일하다가 옆 사무실 직원에게 전할 말이 갑자기 떠오르면 부랴부랴 다시 일어나 찾아가서 일을 보곤 한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다. 한번 뇌 속에 저장된 회로는 반복하면 잘 적응하는데 그 틀을 조금만 벗어나면 적응하지 못한다.
과천에 근무하던 시절 시내에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나갔다가 청사 밖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퇴근 후 차를 찾으러 평소대로 청사 내 주차장에 내려가서 근 삼십여 분을 찾아 헤맸다.
차는 당연히 습관처럼 청사 내 주차장에 주차하던 곳이나 근처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차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청사를 지키는 전경들은 도대체 근무를 어떻게 서는 거야, 차 도둑이 버젓이 청사에 들어와 활개를 치며 차를 훔쳐 가도 못 지키다니!”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참에 “차를 다시 사야 하나. 아니면 먼저 차를 잃어버렸다고 신고를 해야 하나.”라면서 다리가 아파 주차장 옆 돌에 걸터 않아 천천히 하루의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그 순간 “아차!” 하면서 오늘 근무시간에 시내에 나갔다가 청사 밖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기억이 떠올랐다. “껄껄껄, 내가 이렇다니까.” 청사 밖에 주차하고 온 것을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문제는 기억력이 점점 줄어들고 꼬여만 간다는 것이다. 사람이 기억력을 잃어 가는 것은 일종의 망각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갈수록 모든 것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저 기억할 것은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잊어버려도 그만이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경우 종종 문제가 발생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망각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 사무실에 앉아 전화를 받다가 민원인에게 뭔가 해줄 말이 떠올랐다가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거나 사무실 복도에 나갔다가 방향만 바뀌어도 동서남북이 헷갈려 근무하는 사무실을 찾아 헤매곤 한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는 왼손에 차 키를 들고 오른손으로 가방과 주머니를 열심히 뒤적거리며 차 키를 찾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 정신이 이런 상태니 아내의 말마따나 바보처럼 멍청하긴 멍청한가 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멍청한 것은 바보가 아니라는 것에 위안이 된다. 바보가 아니니 최소한 사회생활은 할 수 있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오늘도 아내는 나를 바라보며 멍청한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멍청한 모습은 개선될 여지가 별로 없다. 머리의 기억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별 수 없지 않은가.
남자인 내가 멍청해야지 여자인 아내가 멍청하면 가족을 돌보는 일은 누가 하겠는가. 막내 아이 말에 의하면 며칠 전에 아내가 냉장고에 넣어 둔 핸드폰을 찾아주었다고 한다.
집에서 핸드폰 소리는 울리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 지를 않아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그 속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더란다. 내가 아내에게 “사람이 왜 그렇게 멍청해.”라고 말하면 강한 펀치가 날아올 것이다. 더불어 두 눈을 부릅뜨고 내게 말 조심하라고 주의를 줄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멍청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내가 멍청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이대로 살아가도 문제가 없는 것일까.
가족에게 자주 이야깃거리가 되어 살아가는 가련한 신세지만 멍청한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찾아올까. 아마도 그런 날은 내게 찾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나마 제 때에 밥 먹는 것을 잊지 않고, 차 운전할 때 차선과 신호등을 지키고, 화장실에 가서 뒷일을 제대로 마무리하고, 쓰레기통을 비우러 가서 남의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는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요즈음 아침마다 아내의 안경을 찾아주는 것이 일과가 되어 간다. 전날 저녁에 잠을 자기 전에 자기가 안경을 벗어두고는 아침에 내게 안경을 찾아달란다.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서 안경을 찾다가 못 찾으면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내가 이래서 아내와 더불어 멍청한 인간이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내 가족의 치부를 드러낸 것을 읽으며 슬며시 웃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도 기다려라. 언젠가 당신도 그런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듯이 가는 세월 앞에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가 기억을 잃고 망각의 늪에 빠져 헤매고 있을 때, 당신도 서서히 망각의 늪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