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장맛비가 그치고 나자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모처럼 사무실 텃밭을 찾아와 깻잎을 따고 케일은 뽑아냈다. 케일도 상추처럼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뻣뻣해서 먹을 수가 없다.
텃밭에 올라올 때마다 케일을 뽑아내려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뽑았다. 봄에 케일을 심을 때는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망사를 씌웠는데 망사를 걷어내고 케일을 뽑아내는데 얼굴과 몸에서 땀이 비오듯이 쏟아진다.
케일을 뽑아내고 붉은 토마토와 울타리에 매달린 박을 땄다. 커다란 박이 울타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불안했는데 박을 따고 울타리로 기어올라간 호박넝쿨을 정리했다.
텃밭 정리를 마치고 토마토와 깻잎과 박을 들고 내려오는데 몸에 땀이 나면서 겉옷까지 젖었다. 손에 박을 들고 사무실로 내려오는데 테니스장에서 운동하던 직장 동료들이 다가와 손에 든 것이 뭐냐고 묻는다.
호박이 아닌 박이라고 하자 박이 벌써 그렇게 컸느냐며 놀라는 표정이다. 박을 차에 두고 깻잎과 토마토를 사무실 화장실에 들고 가서 씻고 얼굴을 찬물로 세수해도 더위가 좀처럼 가시지를 않는다.
사무실로 들어와 의자에 앉아 선풍기를 틀어놓고 더위를 식히면서 인터넷을 검색해서 박으로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다. 내 머릿속에는 박으로 요리한 것을 먹어 본 기억이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박으로 생채나 탕국을 끓이거나 볶음으로 요리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지금까지 박은 그늘에 말려서 바가지를 만드는 것만 알고 있었다.
계절은 어느새 한여름을 향해간다. 며칠 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사무실로는 말매미와 참매미 울음소리 그리고 사무실 뒤편의 공사장에서 나는 소음 소리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중첩되어 들려온다.
여름날이면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 앉아 매미 울음소리를 들어가며 수박을 먹던 기억이 생각난다. 특히 길가의 원두막에 올라가서 수박밭을 내려다보며 수박과 참외를 먹던 기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길가의 원두막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바람에 비껴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수박을 먹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정경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금은 원두막과 같은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것을 추구하는 여유로운 문화가 사라졌다. 삶에 이끼가 끼고 도시적 문화를 선호하다 보니 원두막과 같은 아날로그 정서는 추억이 되었다.
나보다 늦게 태어난 세대는 어떤 것을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여유로움으로 생각할까. 사람에게 서정과 낭만을 깃들게 하는 것은 인위가 아니라 자연에서 나온다.
도시적 삶은 자연보다 인위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그에 따라 서정이니 낭만이니 하는 여유로운 마음이 깃들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자연을 보고 자라야 서정성이 자리를 잡는다.
마음이란 바탕에 서정이 자리잡지 않으면 서정적인 이야기나 정경을 떠올릴 수가 없다. 최근에 젊은 사람들이 쓴 산문집이나 수필집을 종종 읽곤 한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글은 잘 쓰는데 서정성이나 낭만적인 감성을 그리는 여유로운 마음을 만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마음에 서정적인 감성이 자리해야 유머와 해학적인 표현이 살아나는데 서정성이 자리하지 않으면 글은 건조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젊은 사람의 글을 읽으면 무미건조하고 무언가에 늘 쫓기는 듯한 마음을 읽게 된다. 그런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의 성장 과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을 유추해보곤 한다.
유년 시절에 자연을 접하며 자란 사람은 본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세계를 그리거나 상상력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한계가 따른다. 허구도 어느 정도 실제적인 바탕을 기본으로 무한의 세계를 그려야 훨씬 구체적인 세상을 그릴 수가 있다.
유년 시절 산과 바다와 하늘과 별과 강을 바라보며 자란 환경은 수학의 공식이나 영어 단어 하나를 외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런 환경은 사람의 본성에 저절로 스며든다.
우리가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꿈도 직간접으로 겪었던 경험에 기반해서 출발한다. 그러한 것이 바탕이 되어 아름다운 소설이나 시나 음악과 같은 뮤즈가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