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고개에 남긴 상처

by 이상역

진천의 잣고개는 문안산과 봉화산 사이의 계곡을 말한다. 청주 방향인 사석에서 잣고개를 넘어가면 진천 읍내가 나온다. 잣고개 이름은 어떤 연유로 부르게 된 것인지 정확한 사연은 알지 못한다.


지금껏 잣고개를 수없이 오고 갔지만, 잣나무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심은 것 외에는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이전에 잣은 城을 의미했는데 문안산 산성 밑에 있는 고개라 하여 잣고개로 부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잣고개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분수령인 6.25 전쟁 때 국군이 남진하는 북한군과 봉화산과 문안산에서 대치하며 전투를 벌인 곳이다. 그 결과 북한군이 남진하는 시간을 지체시켜 국군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하는데 디딤돌을 놓았다고 한다.


잣고개 전투는 6.25 전쟁 발발 후 김석원 장군이 이끄는 국군이 북한군을 상대로 승리한 첫 전투다. 지금도 봉화산 정상에는 그날의 참상을 말해주듯 이름 없는 군인들이 죽어가며 남긴 철모와 유골을 볼 수가 있다.


잣고개 정상에서 읍내로 내려가는 길 오른쪽에 봉화산 산기슭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곳에 6.25 전쟁의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기념탑을 세워 놓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기 위해 잣고개를 내려가면서 처음 대면한 것은 마네킹 경찰이다. 잣고개에서 읍내로 내려가다 커브가 심한 모퉁이에 경찰 옷을 입혀 놓은 마네킹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경찰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경찰 옷을 입혀 놓은 마네킹이었다. 그 마네킹은 진천의 잣고개를 오고 가는 운전자에게 커브가 심하니 운전에 주의하고 조심하라는 일종의 신호수였다.


초등학교 책보를 벗어던지고 교복을 입고 손에 가방을 들고 중학교에 입학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학교에서 배우는 책도 두꺼워졌고 체육복도 갖춰야 하고 교실에서 실내화를 신고 생활해야 했다.


특히 중학교에 입학해서 낯선 풍경은 운동장 주변에 세워 놓은 수백 대의 자전거였다. 또한 초등학교보다 넓은 운동장과 주변의 환경이 초증학교보다 세련되게 다가왔다.


중학교는 규율과 질서를 강조했고, 교복을 입고 있어 행동거지도 조심해야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은 문경은 선생님이다. 국사 과목을 가르쳤는데 통통한 모습과 시골 아저씨처럼 수더분하고 너그러운 분이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배움의 깊이도 교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달랐다. 그중에 영어를 배우면서 매를 맞은 기억은 마음에 영원한 상처가 되어 잣고개에 새겨져 있다.


영어 선생님의 올바르지 못한 교육으로 인해 교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친구들은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을 ‘불독’이라고 별명을 붙여 호칭했다.


선생님은 ‘불독’처럼 얼굴이 항상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덩치도 우락부락해서 ‘불독’처럼 생겼다. 선생님은 소설가 이순원이 쓴 ‘강릉 가는 옛길’에 나오는 선생님과 닮은꼴이다.


이순원이란 작가가 나와 동년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과 묘사가 비슷해서 나와 비슷한 또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엔 왜 그런 이상한 선생님이 학교마다 한 명씩 있었는지 의문이다. 영어 선생님이 “교사가 학생에게 교육을 가르치는 것은 고유권한이다.”라고 변명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보낸 일 년은 가슴을 졸이면서 숨도 한번 제대로 크게 쉬지 못하고 다닌 기억밖에 없다. 영어 수업 시간은 그야말로 공포와 폭력이 난무한 시간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영어 과목을 처음 접하면서 외국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시간은 즐거움이 아닌 매를 맞는 괴로운 수업 시간으로 변했다.


선생님은 영어 수업이 끝날 때쯤 숙제를 내주고 다음 수업 시작 전에 숙제 검사를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숙제를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 철자 하나라도 틀리면 출석부로 학생의 머리를 때리면서 “이게 숙제를 해 온 것이냐?”라고 하면서 학생이 교실 앞으로 나갈 때까지 때렸다.


따라서 친구들은 비록 숙제를 해왔어도 의자에 앉아 있지를 않고 교단 앞으로 나갔다. 그러다 보니 55명의 학생 중 공부를 좀 한다는 친구 몇 명을 제외하고는 숙제를 해왔어도 해오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서 교실 앞으로 나갔다.


영어 선생님의 숙제 검사는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학생이 숙제를 해왔다고 의자에 앉아 있으면 출석부나 구두 샌들로 머리를 맞아야 해서 선생님이 숙제를 검사하면 친구들은 무조건 교단 앞으로 나갔다.


선생님은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들을 상대로 군대와 같이 매를 때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명은 선생님이 직접 회초리로 손바닥을 다섯 대씩 때리는 시범을 보이고 나머지는 친구들끼리 배턴을 넘기는 식으로 친구가 친구의 손바닥을 다섯 때 씩 때렸다.


교육에 체벌의 필요성에 대한 당위성을 떠나서 학생들끼리 매를 때리게 하는 것은 폭력을 조장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아닌 친구에게 손바닥을 맞으면 모멸감만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영어 시간에 매를 맞는 원인도 다양했다. 영어 회화에 대답하지 못하거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성적이 떨어지거나 시험을 잘못 보아도 맞아야 했다.


당시 공부를 좀 못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중간고사 성적이 0점이 나왔다. 그러자 선생님은 친구의 손바닥 백대를 때렸다. 그 친구는 선생님의 매를 피하다 손목을 잘못 맞아 깁스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학생이 상처를 입든 말든 매질은 계속되었다.


아마도 오늘날 그런 선생님이 학교에서 근무한다면 교단에서 쫓겨나 교도소에 갔을 것이다. 그 시절 미국인이 평화봉사단으로 중학교에 와서 영어 시간에 함께 들어와 영어 회화를 가르쳤다.


친구들은 외국인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왼쪽에 달린 명찰을 책상 아래로 숨기기에 바빴다. 영어 회화를 잘하지 못하면 가르쳐 주고 발음이 틀리면 교정해 주는 것이 영어 회화다.


그런데 외국인이 친구에게 영어로 묻고 대답하지 못하면 ‘불독’ 선생님에게 호출되어 출석부나 구두 샌들로 두들겨 맞았다. 언젠가 한 번은 영어 수업 시간에 미국인이 ‘불독’ 선생님에게 학생들을 때리지 말라고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여 따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그 시절 영어 수업시간이 다가오면 친구들의 가슴은 잔뜩 쪼그라들었다. 교실 복도 쪽에 앉은 친구가 교무실 방향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있다가 선생님이 교실로 걸어오면 “떴다.”라는 말과 동시에 교실은 공포심과 함께 적막한 공간으로 순식간에 변했다.


그러다 영어 선생님이 교실 문을 ‘드르륵’ 소리를 내어 열어젖히면 공포의 끝에 다다른 듯이 몸을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영어 수업이 시작되면서 숙제 검사로 매를 맞고 나면 공포심이 줄어들었다.


간혹 선생님이 몸이 아프다거나 다른 일로 수업이 쉬기라도 하는 날이면 친구들 모두가 “‘와”하는 함성과 함께 교실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일 년을 영어 수업시간에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보내다가 상급 학년에 올라가자 영어 시간은 정반대가 되었다. 영어 선생님은 학생을 때리지도 숙제를 내주지도 않았다.


영어 수업 분위기가 일 학년 때와는 너무도 달랐고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는 모습도 부드러웠다. 중학교에서 영어 수업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낸 지도 어언 사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머릿속에는 똬리를 튼 채 깊은 상처가 되어 남아 있다.


지금도 그 시절 영어 수업 시간을 생각하면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는 잣고개에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있다. 뒤늦게 아픈 상처를 꺼내어 밝히는 것은 당시 상처받은 아이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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