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꽃

by 이상역

사람이 태어나면 다른 존재와 구별 짓기 위해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한번 붙여준 이름은 그가 사는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다 생명의 소멸과 함께 그림자와 분리되어 세상을 떠돌게 된다.


‘나’를 타인과 구별 짓고, 사람 노릇 하라고 붙여 준 것이 ‘이름’이다. 내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아이가 태어나도 한두 해 기다렸다 이름을 지었다. 당시는 사람의 목숨이 생존경쟁에 의해 결정되었다.


내 이름도 태어나고 한두 해 기다렸다 아버지가 장날에 지인과 막걸리 한 잔 기울이고 작명소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명의 작명가에게 가문에 대한 내력과 태어난 년, 월, 일, 시 등 사주팔자를 적어주고 부탁했을 것이다.


나의 이름은 아버지와 무명의 작명가가 만나 오랜 흥정 끝에 탄생되었다. 작명에 대한 세세한 사연은 알지를 못한다. 나의 성은 李가이고 본은 淸州다. 이름의 첫 자는 돌림인 상(相) 자를 따왔고, 마지막 끝 자 하나를 작명하기 위해 아버지는 음양오행을 따져가며 길일을 택해 읍내에 가셨을 것이다.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해 한자를 배우면서 이름 끝 자인 ‘易’ 자가 두 개의 음(바꿀 역, 쉬울 이)으로 불린다는 것과 족보를 보고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중시조(이거이 : 李居易) 이름 끝 자와 내 이름(이상역 : 李相易) 끝 자의 한문이 같아서다.


무명의 작명가가 아버지가 들고 간 막걸리에 취해 중시조 이름을 빌려 지은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중시조의 이름 한자와 똑같이 해달라고 부탁한 것인지 그에 대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내 이름의 작명과 관련한 두 분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의 작명이야 어떠하든 아버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밝히고자 몇 푼의 돈을 작명가에게 건네며 이름을 부탁한 것은 아닐까. 지금도 남들이 이름을 물으면 몸에 붙은 것을 열심히 불러준다.


다른 사람에게 내 이름을 불러주고 있지만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제 이름은 이상역입니다.”라고 불러주면 ‘상혁, 상협, 상엽’ 등 새롭게 이름을 작명하여 부르거나 표시한다.


다른 사람이 내 이름 끝 자를 역이 아닌 ‘혁’이나 ‘협’이나 ‘엽’으로 발음할 때면 혓바닥이 뒤틀리는 것처럼 몸도 와르르 꼬인다. 이름에 ‘역’이란 글자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혁’이란 글자가 사람들의 귀에 익어서일까 이름이 뒤틀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


어쩌다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면 존재를 확인해 주듯이 이름 하나 제대로 불러주면 그에게로 다가가는 꽃이 된다.


사람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는 것이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이름을 온전히 알아주고 불러주는 것은 존재를 완전체로 드러나게 한다. 이름 하나 제대로 알아주면 그 사람이 달라져 보이고, 나라는 존재가 몸에 달린 이름을 통해 그림자로 투영된다.


내 이름 끝(역 : 易) 자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마다 불러주는 애창곡이 있다. 부산에 살면 부산역의 역자로, 대전에 살면 대전역의 역자로, 수도권에 살면 서울역의 역자라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역의 역자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이름 하나 때문에 나라의 지명과 역명과 잘 알지도 못하는 경제까지도 들먹이며 살아가는 신세다.


그럴 때마다 이름 끝(易 : 바꿀 역) 자의 훈처럼 이름을 바꾸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이름과 관련한 적(籍)이 하나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을 바꾸려공적장부인 가족관계부, 주민등록증, 학교생활기록부 등에 기록된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더구나 이름을 원작자인 아버지의 동의도 받아야 하는데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바꿀 수도 없다.


나의 이름을 다른 사람이 제대로 알아듣던 듣지 못하던 몸에 붙이고 살아가야 한다. 몸에 이름을 붙이고 사회 생활하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거나, 다른 이름으로 작명하여 부를 때마다 속이 상했다. 그때마다 아버지와 작명가를 원망한 적도 많다.


아버지는 왜 이름을 부르기 좋고,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작명을 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두 번 세 번씩 불러줘야만 알아듣도록 까다롭게 작명을 했을까.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이제는 이름을 달리 부르거나 표시하는 것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길을 걷다 “아저씨 또는 아줌마?”하고 부르면 주변 사람 모두가 돌아본다. 혹시나 그 부름에 자신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러나 특정한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만 얼굴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은 잠깐 고개를 돌아보고는 바로 가버린다.


몸에 붙은 이름은 나보다 늦게 태어났다. 비록 무명의 작명가가 태어난 년, 월, 일, 시 등 우주의 원리를 따져가며 이름을 지었지만 내 몸보다 오래 생명을 누릴 것이다.


내 몸이야 소멸이란 인연이 다하면 그만이지만, 이름은 육신이 사라져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세상에 회자될 것이다.


그간 아버지가 몸에 붙여준 이름이 다른 사람에 의해 달리 부르거나 표시되긴 했지만, 그나마 지금까지 ‘나’를 타인과 구별 짓는 존재로 살아오게 해 줘서 고맙고 감사하다.


몸에 붙은 이름을 온전히 불리도록 노력하는 것은 아버지가 길일을 택해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뜻을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이름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다른 사람에게 꽃이 되어 아름답게 불리도록 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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