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임진왜란에서 죽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억측과 해석이 분분하다. 임진왜란에서 장군이 하늘 높이 치켜들었던 정의로운 칼은 백성과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적의 칼에 의해 목숨을 다할 것인가 아니면 임금의 칼에 의해 목숨을 소멸시킬 것인가를 고뇌하며 장군은 전장에 나섰다. 칼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도 하지만 소멸시킬 수도 있다.
이순신 장군은 칼로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막아냈지만, 그 칼에 의한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바람 앞의 등불인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용서와 자비란 인정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오직 군율과 정의만 존재했고 인정과 관용은 베풀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을 간직하고 전쟁이란 들녘을 향했다. 장군은 임금의 비정한 권력의 칼에 목숨이 소멸되는 것을 피하려고 몸부림쳤다.
사람은 칼을 높이 치켜들면 마음이 비장해진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버리겠다는 긴장감 때문이다.
오늘날 칼은 무기보다 상징으로 존재한다. 사람은 중요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 칼을 등장시킨다. 이때 칼은 마음의 내외를 긴장시키는 경계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칼로써 자신의 마음을 밖으로 표현하려는 것이다.
나라의 정권이 바뀌거나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개혁의 칼을 꺼내든다. 하지만 그 칼끝은 자신의 내부를 향한 것인지 외부를 향한 것인지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칼은 명분이나 대의 또는 목숨과 같은 정의로운 잣대로 작용한다. 칼은 시대를 풍미하는 말로 존재하는 것보다 국민을 위한 진정한 섬김의 칼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칼은 녹슬지 않고 세대를 넘어 유유히 계승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외치는 개혁이란 칼은 따지고 보면 자기 혁신을 위한 것이다. 개혁은 평소의 마음가짐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종교에서 개혁은 먹고 움직이고 잠자는 것 모두를 철저한 계율 안에 가두고 수행하는 것이다. 그만큼 개혁은 평소 이상의 땀과 열정을 쏟아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개혁의 칼을 높이 치켜들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혁신에 대한 의지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정언명령이다. 이 명령은 자신이 내릴 수도 때로는 다른 사람이 내릴 수도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금의 칼이 아닌 적의 칼에 의해 목숨이 다했다. 장군이 살아가던 시대에 등장했던 칼처럼 현대에도 무수한 칼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권력의 칼, 공정의 칼, 혁신의 칼, 여론의 칼, 규제의 칼 등 수많은 칼이 여기저기서 작동한다. 그리고 그 칼끝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
오늘날 내세우는 개혁의 칼은 전쟁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명분은 좋다. 그 칼은 선량한 백성이나 신하의 목숨을 소멸시키기 위해 들어야 할 필요도 없고, 백성의 목숨과 재산을 담보할 필요도 없다.
개혁의 칼은 사회적 명분을 위해 높이 치켜세워야 하는데 늘 한계에 부딪친다. 그 이유는 오로지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서글픔이 배어 있어서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순신 장군이 살다 간 삶의 무게만큼이나 힘겹게만 느껴진다. 한마디로 장군의 삶은 외롭고 고독하고 슬프기만 하다.
장군을 위해 목숨을 다한 여인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묵묵히 바라보아야만 했고 자식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슬픈 마음마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처연하게 다가왔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어쩌면 현실을 외면한 채 개혁이란 칼에 의해 스스로 자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혁의 칼과 적을 향한 칼의 목적과 방향은 같다. 그것은 나라를 지키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백 년 전에 들었던 이순신 장군의 칼을 그리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칼은 자신을 넘어 국가를 지키는 울림의 상징이다. 그 울림이 수단으로 기울면 칼은 가치를 잃고,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 정의가 바로 선다.
내가 그리워하는 칼은 생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아닌 수많은 목숨을 구하는 정의로운 칼이다. 그런 칼의 노래가 그리워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