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 통학생활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동안 통학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다가 형이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중학교 앞 읍내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형(형, 사촌 형)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늦게 오는데 저녁에 먹을 밥이나 해주라며 같이 자취를 시켰다. 읍내에서 자취생활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시골에서 어머니가 해준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다가 스스로 밥을 지어먹고 학교에 다녀야 한다. 읍내에서 자취생활 덕분에 통학버스를 타고 다니는 불편함을 덜었고 학교가 가까워서 시간적인 여유까지 생겨났다.
그 시절 시골에는 중학교에 다니는 형의 친구가 십여 명은 되었다. 한 명이 자취한다고 하자 모두가 방을 얻어 자취를 하게 되었고 형들이 학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면 마치 시골에서 살던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통학버스를 생활을 접고 구공탄을 때는 자취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참고서도 접하고 공부란 것도 했다. 초등 시절은 공부란 개념조차 알지를 못했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참고서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자취하던 읍내에는 같은 반에 공부도 잘하고 주판도 잘 놓는 친구가 살았다. 선생님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결과 성적을 집계해 오라고 친구에게 시키면 친구네 집에 가서 성적과 점수도 미리 알아보고 계산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그러나 읍내에서 자취생활은 통학하는 불편함은 덜었지만, 주말에 시골에 가서 월요일에 등교하는 날은 힘이 들었다. 형들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큰집이나 어머니가 해주는 반찬이나 쌀을 자취 집에 가져가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월요일마다 반찬이나 쌀자루를 들고 버스를 타면 차장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키는 작고 덩치라도 있었으면 힘으로 버티거나 견딜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럴 만한 힘과 체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그 시절엔 힘도 배짱도 소유하지 않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토요일에 시골에 가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통학버스가 오지 않거나 고장이라도 나면 짐을 들고 사석까지 걸어가 청주에서 오는 버스를 타야 했다.
가방에 반찬을 들고 사석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은 버겁고 힘들었다. 지금이야 키도 크고 체격이 있어 반찬이나 다른 보따리를 들고 버스 타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
읍내에서 자취생활하면서 주중에 등하교는 편했지만, 월요일마다 통학버스에서 내려 가져온 물건을 자취방에 갖다 놓고 학교까지 뛰어가는 일은 힘들었다.
월요일마다 교문을 지키는 규율부 선배들에게 지각했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았다. 선배에게 시골에서 들고 온 짐을 자취 집에 두고 오느냐고 늦었다는 이유는 통하지 않았다.
읍내에서 자취생활하면서 사회나 국사나 국어와 같은 인문 과목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사람이 시대와 세대를 잇고 엮어가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고 개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몸의 이곳저곳에서 힘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듯했다.
중학교 시절 처음 백 점을 맞은 과목은 사회 과목이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이번 중간고사가 어렵게 출제되었다며 장담하건대 “백 점을 맞는 학생이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시험에서 백 점을 받았지만 선생님은 정답을 잘 찍어서 백 점을 맞은 것이지 제 실력이 아니라는 말로 둘러댔다. 학생이 백 점을 맞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 점을 맞은 원인과 이유가 중요하다.
학생의 적성과 소질을 발견하고 관심이 있는 분야를 열어주는 것이 교육이다. 내가 공부를 좀 하던 학생이었다면 아마도 다른 학생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면서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칭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의 관심 중심에 있는 것보다 관심 밖에 존재하는 주변인에 지나지 않았다. 반대로 내게도 선생님은 내 주변인에 불과했다.
그 시절 반 친구 중에 어린이 동아신문을 구독하던 친구가 있었다. 신문에 연재된 홍길동 만화가 인기를 끌었고, 한 친구는 무협지를 빌려와 쉬는 시간이나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읽곤 했다.
어린이 동아신문이 교실에 배달되면 흥미로운 만화를 보기 위해 친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붉은 옷을 입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왜적을 물리치는 것을 읽으면 통쾌했고, 홍길동이 변장술을 부려가며 왜놈들을 놀려주고 물리치는 것을 읽어가며 다음 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짝꿍이 무협 만화를 좋아해서 자기가 읽고 나면 순서를 정해 친구들에게 빌려주었는데 짝꿍 덕에 무협 만화를 읽으면서 호기심을 잠재우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 시절엔 칼로 수많은 적을 쓰러트리는 장군이나 영웅을 동경했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홍길동처럼 오뚝이를 갈망한 것 같다.
당시 읍내에서 자취하던 형들 대부분은 청주에 소재한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내가 형들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것인지 대부분 고향에 소재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가끔 자취하던 집에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웃에 사는 여학생이 쪽지 편지를 던져놓고 갔다. 그 편지는 형들에게 보낸 것 같은데 수신자를 적어놓지 않아 먼저 주워 읽는 것이 임자였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고, 담장 너머로 편지를 던지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그런 편지나마 주워 읽으며 자취생활의 무료함과 적적함을 달랬다.
유년 시절부터 몸을 자주 앓던 탓에 얼굴에 수두 자국이 남아 있다. 몸이 약해서 감기라도 걸리면 심하게 앓아 옷이 얼룩질 정도였다고 한다. 자취하던 시절에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자취 집에서 끙끙 앓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이마를 한번 만져보고는 안 되겠다며 시골에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얼굴색이 노랗고 허연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던 것 같다. 그 일로 학교에 며칠간 빠지면서 시골에서 어머니가 지어준 약을 먹으며 쉬었다.
읍내에서 자취를 하면서 나무가 아닌 연탄으로 밥을 짓는 것도 배우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삶도 배웠다. 그때 자취생활은 나중에 대학과 직장생활을 하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삶의 방식은 영원히 몸에 기억되고 남는 것 같다. 가끔 형들과 공부가 무료해지면 컴컴한 밤에 중학교 운동장에 가서 공을 찼다. 컴컴한 밤에 공을 차는 것은 아주 재미가 있다.
밤에는 공보다 상대방 숨소리나 목소리를 들으며 공의 움직임을 예측해서 반응하게 된다. 컴컴한 밤에 운동장에서 공을 차면 상대방을 속이기가 쉽다.
공은 미리 상대편 골문을 향해 차 놓고 소리만 지르면서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면 상대방은 공을 갖고 뛰어가는 줄 알고 따라온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상대방에게 공은 이미 골대로 들어갔다고 주장하며 골대에 가서 확인하면 상대방은 허탈해했다. 여름날 컴컴한 밤에 중학교 운동장에서 형들과 공을 차며 놀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 곁에서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며 함께 내달리던 밭은 숨결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고요한 그리움의 물결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