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배움의 향기

by 이상역

중학교에 입학해서 일 년은 영어 시간에 선생님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친구들은 교실에서 장난을 치고 소란을 피웠다. 영어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 것 외에 또 다른 사건 하나가 기억난다.


나와 같은 세대라면 학교나 동네에서 매를 맞거나 누구와 싸우거나 단체로 학교에서 체벌을 받은 이야기를 빼면 아마도 할 말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 시절엔 매와 기합과 싸움이 일상이었다.


중학교 일 학년 때 옆 교실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3학년 교실이었다. 언젠가 하루는 우리를 가르치는 과목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늦게 들어오셨다.


그날 반장은 친구들 자습을 시켰지만 친구들의 장난이 심해지자 교실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그러자 옆 교실에서 3학년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며 몇 번 주의를 주고 갔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친구들이 계속해서 떠들자 그 선생님은 수업을 진행하기가 힘들었는지 우리 모두를 교실 뒤편 빵집 앞에 집합시켰다. 잠시 후 선생님의 손에는 야구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바라본 친구들은 몸을 파르르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이 녀석들 안 되겠다.”라고 하면서 한 명씩 나와 손을 땅에 짚고 엎드리게 하더니 엉덩이를 다섯 대씩 때렸다.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맞은 친구들은 개구리가 회초리를 맞아 사지를 쭉 뻗듯이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는 땅에 엎어졌다. 나는 중간보다 뒤쪽에서 기다리는데 선생님이 친구들을 때리는 힘과 강도가 차츰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내 차례가 되어 앞에 나가 엎드려 엉덩이 다섯 대를 맞고 나자 엉덩이가 얼얼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이후 친구들은 선생님의 그림자도 피할 정도로 무서워서 피해 다녔다.


우리가 배우던 교실은 큰 건물 뒤편의 오래되고 낡은 단층 건물이었다. 교실 좌우 언덕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형성해서 우거졌고, 교실 앞에는 큰 건물이 서 있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다.


친구들은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찾아다니며 더위를 식히고,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을 찾아다니며 해바라기를 즐겼다. 그 시절 배움의 향기가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은 음악실이다.


지금도 음악 선생님에게 배운 노래들이 생각난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머나먼 저곳 스와니강물 그리워라 날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 ‘노래는 즐겁구나 산 너머길 나무들이 울창한….’ 등이다.


음악 시간이 되면 교실에서 음악책을 들고 피아노가 놓인 음악실로 가서 선생님에게 음악을 배웠다. 노래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자극제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배우는 음악 시간이 기다려졌고 친구들과 목소리를 높여가며 노래를 부르던 추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중학교 시절 불편한 것은 교복을 입고 생활하는 것이다. 교복을 입으면 행동에 제약이 따르고 멀리서 봐도 학생 신분이 드러나서 튀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중에 가장 불편한 것은 등교할 때다.


어쩌다 학교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뜀박질을 하면 몸에 땀이 나서 씻어야 하는데 교복을 벗을 수가 없어 땀을 씻을 수도 없었다. 당시 잣고개 너머 사석의 여섯 개리에 사는 학생들은 버스 한 대로 통학했다.


통학버스가 늦게 오거나 학생이 많이 타서 버스가 늦게 도착하는 날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학교에 지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에는 학생의 규율을 지도하는 선도부가 있는데 그 선도부의 지도를 맡은 선생님도 ‘불독’이었다.


교복을 입은 상태가 불량하면 선생님에게 불려 가 따귀를 맞거나 지각을 하면 체벌을 받았다. 통학버스가 정차하는 곳에서 중학교 교문까지는 약 삼 백여 미터에 이른다. 버스가 좀 늦게 도착하는 날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방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갔다.


키는 작고 손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뜀을 뛰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학생을 붙들어 놓고 지각했다고 체벌을 주거나 때리곤 했다.


아침에 교문에서 체벌을 받고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들으면 오전 내내 귀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규율과 질서라는 명분을 위해 학생이란 인격체는 존중받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저 잘못하면 맞아야 하고 체벌을 받으며 그에 대한 저항은 꿈도 꿀 수 없던 시절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규율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학년 전체를 대강당에 집합시켜 단체로 체벌을 가했다.


그런 날은 선도부 선배들이 읍내에서 학생 신분에 어긋난 행동을 한 친구들을 강당 앞으로 불러 내어 몽둥이로 때리고 나머지 학생들은 강당에서 원산폭격 상태로 체벌을 받았다.


원산폭격을 하고 나면 머리의 명치 부분이 아파서 진물이 나고 한동안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그 시절엔 툭하면 학생을 때리거나 체벌을 가하거나 온갖 말로 협박해서 일사불란한 질서를 조장했던 것 같다.


중학교 다니던 시절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통학에 필요한 버스비 외에 용돈은 거의 손에 쥘 수 없었다. 그 당시 버스요금이 20원이고 버스에는 운전기사 외에 남자 조수와 여자 차장이 타고 다녔다.


버스요금은 차장이 받고 조수는 버스 정비나 후진할 때 뒤를 봐주는 운전기사 보조 역할을 했다. 그때는 버스 운전기사가 인기 있던 시절이라 일정 기간 조수로 일을 해야만 운전기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버스요금을 받는 차장 중에 동네에 사는 한 해 선배 누나가 한 명 있었다. 그 누나는 같은 동네에 사는 학생을 만나면 차비를 받지 않고 태워줬다. 버스는 일정한 코스를 순환하기 때문에 한 달에 몇 번 그 누나를 만났다.


그때마다 누나는 버스를 공짜로 태워줘서 차비를 모아 두었다. 그리고는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에 버스를 타지 않고 읍내에서 시골까지 절약한 차비로 빵을 사서 가방에 넣고 이십 리를 걸어오며 먹었다.


중학교 앞 가게에서 빵 두 개를 사서 가방에 넣고 잣고개를 올라가며 먹거나 사석의 초등학교를 지나면서 먹었다. 그렇게 모은 버스비로 빵을 사 먹거나 가끔은 학교 뒤편에서 파는 10원짜리 찐빵도 사 먹었다.


빵집이 교실 옆에 있어 수업 시간이면 아주머니가 찐빵을 쪄서 솥뚜껑을 열어젖혔다. 아주머니는 일부러 찐빵 냄새를 피워 허기진 친구들의 마음을 유혹했던 것 같다. 수업 시간에 찐빵의 고소한 냄새에 침을 흘리다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은 빵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아주머니는 찐빵을 팔면서 받은 동전을 커다란 광주리에 담았는데 쉬는 시간마다 동전 10원짜리가 가득하게 쌓였다. 따끈한 찐빵에 하얀 설탕을 찍어 한 입 떼어먹으면 입안에서 달콤한 팥이 사르르 녹으면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찐빵만큼이나 순진하게 보낸 학창 시절이 아니었을까. 빵집 옆 학교 울타리가 설치된 경계에는 허름한 송판을 대어 만든 엉성한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은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잠재운 장소였다. 화장실에는 또래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성에 대한 그림과 욕과 사랑 이야기를 너저분하게 그리거나 써 놓았다.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 성교육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없었다. 따라서 화장실에 써놓은 각종 유머와 연애 이야기는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가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낙서 읽는 재미에 폭 빠지면 볼일을 보고 나오는 것이 싫을 정도였다.


화장실에 써 놓은 각종 가십거리를 읽으며 서툴게 성을 배우고 호기심을 잠재운 시절은 지나갔다. 학창 시절에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더니 지금은 저문 삶이 아련하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자꾸만 나를 불러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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