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出世)의 변

by 이상역

서른 즈음에 직장이란 낯선 세계에 들어와 철새처럼 근무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러다 뒤늦게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해서 텃밭을 지키며 살다 보니 삶의 둥치가 굵어졌다.


몸의 둥치와 허리도 불어나 어느덧 지천명의 고개를 넘어 이순을 바라본다. 그동안 몸담고 있던 직장에서 다른 텃밭을 넘겨다보거나 기웃거리기도 해 보았다.


그러나 내가 몸담은 직장을 벗어나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양어깨에는 가족의 부양에 대한 책임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직장에서도 다른 곳을 넘보기에는 몸과 마음이 화석처럼 굳어졌다.


고교 시절 플라타너스와 미루나무 이파리가 펄럭이는 운동장에서 교감 선생님이 교단에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졸업하고 지방에서 면서기라도 하면 한 달에 쌀 한 가마니 값의 봉급을 받을 수 있으니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은 공부라도 해서 시험을 보라고 조회 때마다 말씀하셨다.


그때 교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공무원이란 직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를 하다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것이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인연이 되었고, 한번 내디딘 발은 삶의 전부가 되었다.


공직에 들어와 인사나 교류로 생활의 장소를 이곳저곳 옮겨 다녔다. 그러다 보니 시골 촌놈이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서울 사람 행세를 어설프게 하다가 서울 여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고향의 친구들은 나를 보고 촌놈이 출세했다고 한다. 촌놈이 넥타이를 매고 서울 사람 행세하고 서울 여자를 만나 결혼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출세라면 적어도 공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 회사의 사장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시골 촌놈이 서울 사람 행세하는 것과 서울 여자를 만나 사는 것을 두고 출세했다면 나와 같이 출세한 사람은 허다하게 많을 것이다.


나는 아내와 연애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결혼이란 제도권 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결혼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낯선 땅에서 홀로 살아가는 막막함과 미래에 대한 설계도 접은 채 결혼이란 낯선 만남을 선택했다.


시골 촌놈과 도시 깍쟁이 여자가 만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안 봐도 뻔하다. 시골 촌놈이 말과 계산에서 아무리 똑똑해도 도시의 깍쟁이를 이겨 낼 수가 없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한다지만 지피지기를 아무리 헤아려도 아내를 이겨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지는 싸움만 이골이 나게 하면서 살아왔다. 그저 아내와 싸워 이겨 본 것이라곤 술 한 잔 마시고 들어와 앞뒤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소위 무대포)로 우길 때다. 그것도 내가 하는 말이 사리에 맞지 않아 아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이겼다고 지레짐작만 한 것뿐이다.


결혼하고 부부싸움도 하면서 어찌어찌 살아가다 보니 삶의 허술한 울타리가 만들어지고,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이들도 태어나고, 결혼생활도 직장의 경력처럼 쌓여갔다.


세월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아내와 매번 칼날처럼 대립하던 마음도 무디어졌다. 서로 내 것 네 것을 우기고 챙기려던 이기적인 울타리도 허물어졌다. 시골 무지렁이는 서울깍쟁이로 변해갔고, 서울깍쟁이는 반대로 시골 무지렁이로 변해갔다.


결혼 후 양쪽의 칼날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던 방향에서 무디어 가는 방향으로 변해가자 지금은 정반대가 되었다. 내가 더 계산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 부부싸움에서 간혹 아내를 이기기도 한다.


요즈음 아내에게 “당신 나 때문에 출세했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로 인해 이런저런 세상 구경도 많이 하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도시 깍쟁이를 시골 무지렁이로 변하게 해 준 것 모두 내 덕 아니냐고 말해준다. 그러면 별 싱거운 소리를 한다며 뜻 모를 웃음만 짓는다.


내가 고향을 등지고 서울에 올라와 생활하면서 출세란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나 서다. 봄철에 진달래꽃이 피었다가 지고 휘파람새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를 몇 번 듣고 난 후 어렴풋이 깨달았다.


출세란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나 돈을 많이 모은 것을 비유해서 출세란 말을 사용한다. 출세란 내가 몸담고 있던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제쳐두고 지위가 높고 사장 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출세했다고 한다. 내가 출세한 것은 고향의 뒷동산을 등지고 동구 밖 낯선 대처를 선택한 것이다.


자기가 몸담고 있던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가면 낯선 것들이 기다린다. 그곳에서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험난한 모험이 기다리고, 나를 반겨주지 않는 두려운 것을 만난다. 그런 모험과 두려움과 예기치 않은 만남이 기다리는 곳에 나는 멋모르고 뛰쳐나왔다.


그렇게 고향을 등지도 나온 지도 꽤 여러 헤가 되었지만, 이제는 또 다른 출세를 하고 싶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등지지 않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비록 몸은 타관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신세지만, 마음만이라도 깊은 속 뜰을 여행하는 사유의 세계를 즐기기 위해 출세를 하고 싶다. 지금에 와서 무슨 출세냐 하겠지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출세에 지금까지 맺어온 인연을 버리고 가려는 것은 아니다.


출세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세상과 인연을 오롯이 접고 자신의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절대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두 번째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 않고 마음의 속 뜰을 여행하는 내면의 길을 찾아 떠나는 길이다.


나는 두 번째 길을 선택해서 가려고 한다. 전자의 길은 내가 가기에는 세상에 내린 뿌리가 너무 많고 한계와 경계가 뚜렷해서 갈 수가 없다. 하지만 후자의 길은 어떠한 제한도 경계도 없는 무한으로 열린 길이다.


그런 무한의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특별한 행사를 벌이고 싶지는 않다. 삼국지에서 촉나라 제갈공명은 다른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명문의 출사표를 던졌다.


나는 출사표 대신 이렇게 글로써 내면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동안 세속의 텃밭에 심어 놓은 것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마음의 텃밭이나 가꾸면서 무한의 세상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 부득이 고향을 등지는 출세를 선택했다. 이제는 무언가를 등지지도 않고 내면의 고독과 외로움과 싸우면서 나란 자화상을 대면하고자 하는 것이 출세의 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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