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빗자루

by 이상역

휴일 날 집에서 베란다 청소를 하려고 빗자루를 찾는데 눈에 띄지를 않는다. 아내에게 빗자루가 없느냐고 묻자 어디선가 몽당빗자루를 들고 나와 건네준다.


빗자루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아니! 이거 아버지가 우리 결혼할 때 주신 빗자루 아닌가?”하고 묻자, 아내가 “결혼 후 우리 집에 남은 것은 이것밖에 없다.”라며 한숨을 짓는다.


나는 베란다 청소도 잊은 채 한참 동안 몽당빗자루를 들고 신비한 물건처럼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아내와 결혼한 지 그럭저럭 삼십여 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수없이 이사 다니면서 몽당빗자루를 챙겼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결혼할 때 아내가 준비해 온 혼수품과 부엌 살림살이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사를 많이 다녀서 혼수품과 살림살이 대부분은 깨지거나 흠이 생기면서 버리거나 새것으로 교체했다.


시골에 살던 시절 몽당빗자루를 들고 방과 봉당과 마루를 쓸던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몽당빗자루는 긴요한 청소도구다. 몽당빗자루는 방이나 마루 등을 청소하는데 제격이다.


아버지는 가을이면 이것저것 챙기는 것이 많았다. 그중에 수숫대도 빠지지 않았다. 가을걷이가 끝나갈 때쯤 수숫대를 낫으로 수술이 달린 끝머리 부분을 잘라 집에 가지고 오셔서 노끈으로 수숫대를 엇갈려 묶고 헛간에 걸어두셨다.


그리고 가을철 농작물 수확 작업이 끝나면 하루 날을 잡아 수숫대에 달린 수술을 털어내고 빗자루를 엮었다. 아버지는 빗자루를 하나만 만들지 않고 출가하거나 출가할 자식에게 나누어 주려고 여러 개를 만들었다.


내가 결혼하던 해 시골에 갔을 때 아버지가 방 청소하는데 쓰라며 빗자루 하나를 건네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어떻게 서울로 가져오고 관리했는가에 대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빗자루를 끈으로 엮는 작업을 어깨너머로만 바라보고 빗자루를 직접 엮는 방법은 배우 지를 못했다. 지금이라도 수술이 달린 수숫대만 있으면 기억을 되살려 빗자루를 엮어보고 싶은데 마음만 앞선다.


요즈음은 빗자루도 장인으로 지정을 받은 사람이 만드는 전문적인 일이 되었다. 당시 아버지에게 빗자루를 엮는 방법을 배웠다면 빗자루 만드는 장인으로 지정되어 빗자루 만드는 전문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세대가 농촌에서 다루던 일은 오늘날 전통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전문화된 일로 변했다. 짚신 엮기, 빗자루 엮기,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이엉 엮기 등은 농촌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젊은 사람이 하나둘 도시를 찾아 떠나자 농촌은 전통문화를 이어갈 사람이 없어지고 말았다. 오늘날은 도시 사람뿐만 아니라 농촌 사람도 아파트 주거문화를 선호한다.


아파트는 관리하기가 참 편하다. 가스불 끄고 필요 없는 전원 끄고 현관문만 닫으면 끝이다. 아파트에는 넓은 마당이 없어 청소하기도 쉽다. 청소기로 방과 거실을 밀고 다니며 먼지와 쓰레기를 빨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아파트의 베란다나 화장실 등은 청소기보다 빗자루를 이용해야 한다. 수숫대로 만든 빗자루를 오래도록 사용하면 손잡이나 끝부분이 닳고 닳아 빗자루 전체가 뭉툭해진 것을 몽당빗자루라고 부른다.


몽당빗자루를 들고 베란다 청소를 마치고 거실에 들어와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혼 후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살림살이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몽당빗자루 외에는 남은 것이 없다.


우리 집에서 그나마 고향과 시골의 정서를 대변해 주고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몽당빗자루다. 몽당빗자루는 바라만 보아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과 빗자루를 만드는 모습이 새록새록 환영처럼 떠오른다.


비록 우리 집에서 베란다를 청소하는 신세로 전락된 몽당빗자루지만, 그나마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 집에 남아 자리를 지켜 준 것에 고맙고 감사하다.


내 삶의 바탕은 이 세상 어디를 가나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삶에서 부모님을 생각하고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도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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