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서정주, ‘자화상’).
날씨가 쾌청하고 명징한 날에 시를 읽으면 시심에 더욱 빠져든다. 이런 날은 종종 詩 속에서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단서나 행간을 서성이는 시인을 만나기도 한다.
시란 그런 것 같다. 우주라는 넓은 바다에 마음의 파문을 일으키는 물보라가 아닐까. 미당 서정주는 ‘자화상’이란 詩에서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고백했다. 시로써 형상화할 수 있는 멋진 이미지란 생각이 든다.
詩에 대한 느낌은 나이와 계절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학창 시절엔 그저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천천히 읽어보니 시인의 절절한 마음과 무언가 가슴에 짠하게 부딪히는 것이 느껴진다.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詩를 읽어보니 그 의미가 새삼스럽다. 詩의 시심에 빠져들수록 고독과 사색을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보란 의미로 다가온다.
나의 자화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나를 키운 바람은 무엇일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슴에 심어준 희망이란 바람일까. 미당의 마음처럼 세상이란 거친 바람일까. 아니면 현재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거친 욕망이란 바람일까.
이것저것 곰곰이 생각해도 정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나를 키운 바람은 명예도 자리도 욕심도 아닌 그저 그렇게 무심하고 허망하게 흘려보낸 세월이 전부가 아닐까.
미당의 시구처럼 나를 키운 건 바람이 아닌 허망한 세월이란 말밖에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나는 팔 할을 넘어 그 이상의 세월을 허망한 마음으로 보낸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 시절 학교에 늦지 않으려고 무거운 가방을 움켜쥐고 교문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간 시간. 고향을 뛰쳐나와 호구지책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수많은 시간. 직장에 들어와서 남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탐욕을 부린 시간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더불어 겸손이 아닌 만용을 부린 시간과 나 아닌 다른 존재를 괴롭히기 위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남들처럼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아왔다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몸이란 육신에 나이테만 겹겹이 쌓인 초라한 자화상이 전부다.
자화상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그대로 투영된다고 한다. 바람을 맞고 자란 사람은 바람 같은 형상이, 이기심이 많은 사람은 욕망이 덕지덕지 붙은 형상이 새겨진다고 한다.
나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저 허망한 세월을 좇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그런 모습이 아닐까. 고향을 뛰쳐나와 직업을 얻기 위한 노력도, 남들과 같이 잘살아 보겠다는 간절한 희망도 물거품으로 끝나버린 회한의 날들로 인해 초췌해진 그런 모습이 아닐까.
나의 자화상에 살을 찌운 바람은 무엇일까. 나를 뒤쫓아 오는 무수한 그림자와 그 뒤를 이어 줄줄이 따라오는 거친 숨결들. 오늘이란 시간이 나란 존재를 위협하며 휘몰아가는 세월이다.
미당이 추구했던 진정한 자화상은 무엇이었을까. 스물세 해 동안 찾은 것이 세상의 바람이었다면 남은 인생에서 자신을 키워 준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바람이었을까 아니면 친일이란 덫을 지우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오로지 시인의 가슴속에만 있을 뿐 아무도 찾을 수 없다.
가을이 어느새 곁으로 찾아왔다. 여름이란 계절의 자화상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는데 가을이 벌써 길목에서 우두커니 서성거린다. 계절도 스스로 자화상을 그리지 못하고 시간은 서둘러만 간다.
덧없는 삶을 좇으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것을 잊어버리고 자화상이나 그리며 살아가는 삶이 옳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
오늘도 나그네와 같은 삶의 여정에서 나라는 초췌한 자화상이 앞길을 가로막아 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가을이란 계절의 문턱에 기대어 지나온 여름의 시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나란 자화상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