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뒷간이 언젠가 재래식에서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재래식 뒷간에 대한 기억은 수세식보다 더 많다. 뒷간이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뒷간에 가면 귀신이 나온다거나 뒷간에 가면 빠져 죽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사라졌다.
뒷간이 집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사회적 문화적 행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는 뒷간이 재래식에서 수세식으로 변화되면서 문화적 친밀도가 높아졌다. "사돈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라는 속담처럼 재래식 뒷간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곳이라 살림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두어야 했다.
뒷간이 살림집과 멀리 떨어지자 귀신이 나온다거나 한밤중에 그곳을 지나가기만 해도 으스스한 기분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다 뒷간이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귀신이 나온다거나 무서움과는 멀어지고 친밀하고 내밀한 공간으로 변화되었다.
두 번째는 뒷간이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악귀를 물리치는 신성성의 대상에서 사라졌다. 농경문화에서 뒷간은 거름을 생산하는 곳이자 악귀를 물리치는 장소였다.
정월 대보름에 어머니는 칠성신을 모시기 위해 떡을 접시에 담아 부엌, 뒷간, 외양간, 장독대, 안방, 건넌방, 대문 등에 놓아두고 악귀를 물리치고 가족들의 평안한 안녕을 기원하며 치성을 드렸는데 뒷간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제외되었다.
세 번째는 재래식에서 수세식 변경은 농경사회가 도시사회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재래식은 쪼그려 앉는 농경문화의 상징이고, 수세식은 의자에 걸터앉아 일하는 도시문화의 상징이다.
재래식은 농경사회에서 공동체라는 문화적 바탕에서 출발한다. 공동체 문화는 누구의 것이란 소유의 개념이 약하다. 따라서 재래식 뒷간은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무나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세식은 도시의 개인주의 문화라 누구나 뒷간을 사용할 수 없고 주인의 승낙을 받아야 한다. 이는 농경사회의 공동체 문화가 사라지고 도시사회의 개인주의 문화가 팽배한 사회로 이동한 결과다.
끝으로 재래식과 수세식에서 누렸던 추억의 차이다. 재래식에는 성장기 시절에 겪은 여러 가지 추억이 떠오르지만, 수세식에는 성장기 시절의 추억이나 이야기가 별로 없다.
시골에서 재래식 뒷간에 갈 때는 손에 읽을거리를 화장지 겸용으로 들고 갔다. 그리고 읽을거리가 없으면 뒷간 주변에 널려 있는 종이쪽지를 주워 들고 읽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새 농민 잡지나 서울신문과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다. 당시 아버지가 마을 이장을 보고 있어 새 농민 잡지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신문은 매일 마다 배달되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보낸 편지가 뒷간 구석에 늘 꽂혀 있었다. 재래식 뒷간에서 볼일을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신문에 연재된 역사소설이다.
그 소설은 고려시대 몽골과의 싸움에서 김인후라는 스님이 용인의 처인성에서 몽골의 살리타이 장군을 화살로 쏘아 죽임으로써 몽골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칼과 활로 싸우는 전쟁에서 대장이 죽으면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다. 몽골군 대장이 죽는 바람에 몽골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뒷간에서 읽은 것이 소설인 줄 알았는데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버지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보낸 편지다. 아마도 큰 형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는데 고등학교 진학과 공부를 어떻게 시킬 것인가에 대한 아버지의 고민을 답장 형식으로 써서 보내온 것으로 기억된다.
그 편지를 읽으며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교육관과 사랑을 일부나마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편지를 엿보는 것은 설렘을 갖게 한다. 편지의 양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뒷간에 가면 편지가 한두 번쯤 접혀 화장실 구석에 꽂혀 있었다.
요즈음은 시골에서도 재래식 뒷간을 만나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만큼 농촌도 농경사회가 아닌 도시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반증이고, 공동체 문화보다 개인주의 문화를 추구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뒷간이 재래식에서 수세식으로 변한 것은 농경사회를 버리고 도시적 삶을 그리워하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의 표상이다. 더불어 공동체 문화에서 누렸던 공간이 사라진 것은 문화의 상징적인 소멸과 상상력이 빈약해졌다는 함축적 의미도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