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꽃무늬 벽지의 모텔이 아니라
"공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지"
이 한마디가 몇 주간 전국의 공장 9개를 다 돌면서 스터디해보라는 뜻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선뜻 "네,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라며 호기롭게 말한 나 자신을 쥐어박고 싶었다.
하루는 강원도. 그다음 날은 경상북도. 모레는 전라도.
대체 어느 머리에서 이런 출장 스케줄이 나온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9-6이니 출장 가는 공장에도 9시 전에는 도착해야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고 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집에서 ktx를 타고 9시 전에 전라도에 있는 공장에 도착하려면.. 새벽 6시 10분 기차를 타야 했다. 그럼 집에서는 5시 50분 정도에는 나와야 했고, 5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솔직히 공장에 하루 가봐서 뭘 많이 배우겠나.
여기저기 "신입사원입니다. 작년에 입사하였고, 대학교는 어디 과를 나왔으며..." 등 인사 나누고 공장 라인 투어 잠깐 하다 보면 저녁이었다.
회식 장소는 공장 근처의 고깃집이었다.
"여 사원은 처음이네. 그것도 10년 만에 신입사원이라니. 대단한가 봐"
10년 만에 처음 뽑은 신입 여 사원이라는 타이틀은 사람들에게 나의 남다른 점을 찾게 만들기 딱 좋았다.
사람들은 '어딘가 특출 난 게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SKY 출신, 네이티브 스피커, 대기업 인턴 경험 등 각종 화려한 스펙으로 나를 유추해보았지만 아쉽게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00 본부 신입이면 고기 잘 구워야 돼. 구워봐"
특출 난 점을 찾다가 실망한 그들에게 다른 실력을 발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겉은 튀기듯이 바삭하면서 씹으면 육즙이 흘러나오는 목살까진 아니더라도, 무난하게 촉촉하며 탄 부분 하나 없도록 고기를 구워 그들의 접시에 놔 드렸다.
10인분 쯤 구웠을까, 집게와 가위를 계속 쥐고 있었던 터라 오른손 검지가 빨갛게 눌려있었다.
온몸이 고기 냄새로 뒤덮였다.
긴 생머리는 청순한 느낌을 주기에 딱 좋지만 (내가 청순하다는 뜻은 아니다) 음식 냄새가 참 잘 배는 단점이 있다. 얼른 숙소에 들어가 깨끗이 샤워를 하고 잠들고 싶었다. 다음날에도 새벽에 일어나 다른 지지역으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숙소는 여기야. 잘 자고 6시 30분에 1층에서 보자."
모텔 촌으로 들어갈 때부터 감지를 했어야 했는데.
진흙 속의 진주라고 모텔 촌에서도 비즈니스호텔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모텔 특유의 어두운 불빛의 통로를 지나 508호에 도착했다.
현란한 꽃무늬 벽지가 눈에 띄었다.
화장대처럼 보이는 곳에는 공장 접대실에서 자주 보이는 믹스커피와 종이컵이 있었다.
회사 출장이라고 하면 깔끔한 비즈니스호텔의 로비로 끌고 가는 캐리어 가방.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근처 카페에서 사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떠오르곤 했었다.
현란한 꽃무늬 벽지가 보기 싫어 불을 다 꺼놓으니 왠지 모르게 무서워져 소리 '1'로 티비를 켰다.
바람에 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잠겨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재차 잠김 여부를 확인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이 안 와 인스타를 보다가 대학교 친구가 회사 연수원에서 동기들과 술잔으로 짠 하는 부메랑을 보았다.
거기 연수원은 참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