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택의 쿼카 Dec 31. 2022

연두색 공장 작업복이 저에게 딱인가요

셔츠에 사원증 맨 회사원을 부러워합니다   




“스몰 아님 미듐?” 공장 총무 직원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작업복 잠바 사이즈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오버핏으로 미듐을 입어볼까 하다가 밝은 연두색인 것을 보고 그냥 스몰 사이즈로 겟했다.


안 그래도 색이 튀는데 사이즈까지 크다면, 멀리서 보면 무슨 큰 나방처럼 보일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공장 관리 일에 뛰어들기 전에 작업복을 입음으로써 “준비 완료!”를 외치는 기분이 들었다. 미술 시간에 물감 칠하기 전에 팔토시를 하는 것처럼.


‘공장에서 일하면 옷 살 돈은 많이 세이브되겠군.’


다들 공장복만 입고 다니기도 했고,

예쁘고 비싼 옷을 공장에서 입으면 뭐가 묻고 더러워지기 십상이라 입기 어렵기 때문이다.


작업복 잠바에 검정 바지에 발 편한 운동화. 그게 딱이었다.




하루는 본사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본사에 회의가 잡혔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동기들도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서울 집에서 가까운 본사라 출퇴근이 가까워 뛸듯이 기뻤다. 설렜다.


어떻게 입고 가야 할지 전날까지 계속 고민을 했다.

공장 출근이 아닌 본사니까.


면접 때 입었던 '비즈니스 캐주얼' 룩을 다시 꺼내야 할 때가 왔다.


큰맘 먹고 W** 사이트에서 산 10만 원짜리 하늘색 셔츠, 면접 볼 때 입으려고 산 검정 슬랙스를 픽해서 대보았다. 기분 좋은 낯설음이었다.




평택에 가려면 새벽 5시 반에는 일어났어야 했는데, 서울로 출근하니까 7시에 일어나도 충분했다.


사원증 없이는 본사 건물에 출입이 안 되어 로비에서 임시 방문증을 발급받았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8시 20분. 빈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내 모니터를 보는 척했다.


8시 45분쯤 됐을까 사람들이 엄청 들어오더니 다들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한 손엔 스타벅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사람들이 많았다.


셔츠, 슬랙스, 구두, 백, 그리고 사원증

아무래도 본사에 계신 여성분들의 패션에 계속 눈이 갔다. 통 넓은 슬랙스 바지에 스텔레토 힐을 신으신 한 여성 분은 왠지 모르게 프로페셔녈하게 보였다.



그보다도 가장 멋있었던 것은, 아니 부러웠던 것은 목에 맨 '사원증'이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임시 방문증이 사원증이었으면 어떨까 상상을 했다. 목에 맨 사원증으로 회사 입구에 띡! 찍고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은 내가 대학생 때부터 그렸던 회사원인 나의 모습까지 거쳐 올라갔다.



흰 셔츠의 소매를 올린 채 노트북을 하는 나. (여기서 포인트는 손목에 찬 실버 시계)  

스마트해 보이고 있어 보이지 않는가.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윤현우(송중기)가 자기 또래가 회사원 복장에 사원증을 맨 걸 보고 큰 결정을 한다. (안 본 분들 스포일까봐 말 아낌)


물론 드라마라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 윤현우의 망연자실한 씁쓸한 표정은 이해가 간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 슬픔...


나만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은 이내 내가 '잘 못 살아왔나'? 의문을 갖기에 충분했다.


공부 좀 더 해서 좋은 대학 갈걸. 과에서 학점 좀 잘 맞아서 두각 드러내 볼걸. 자격증 시험 더 따둘걸. 난 왜 안 했지?


내 자신이 걸어온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분노를 수반했다.




오후 3시쯤 동기들과 1층 로비에 있는 카페에 내려갔다.


줄 서서 아아를 마실까, 아바라(아이스바닐라라떼)를 마실까 고민하던 중 이상한 걸 발견했다. 가격표가 없었다. 내가 가격판을 못 찾고 있는 거겠지.


그런데 내 앞에 있던 다른 직원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하고 쿨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아, 커피가 직원들에게 무료구나!’

본사 직원들을 위한 사내 카페테리아였다.


본사 동기에게 물었다.

“와.. 너 그럼 매일 여기서 아아 마셔? 무료로?"

"그렇지.. 근데 여기 커피 별로 맛없어. 대충 타 주거든. 무료라서 그런가"


그 말을 듣고 커피를 마셔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갑자기 내가 받아온 아아가 맛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야, 공장 믹스커피보단 낫지 않겠냐 그래도"

"ㅋㅋㅋㅋㅋ아 그것보단 낫지 당연히. 믹스 커피 살 겁나 찐대"




6시에 본사 퇴근하고 인근 지하철역을 가는 중이었다.

드디어 내 또래의 직장인들을 무더기로 마주칠 수 있었다. 그들과 비슷하게 입은 나는 그들의 행렬에 동참했다.


'매일 아침마다 뭐 입고 출근하지 생각하려면 귀찮긴 하겠다'


그러다가, 나는 공장이 아니라 본사에 갔으면 어떤 옷들을 입었을까? 즐거운 상상을 했다.


어떤 셔츠에 스카프와 스커트를 매칭할까?


원색보다는 무채색, 화려함 보다는 심플한 걸 좋아하니 블랙 트위드 자켓에 플리츠 스커트를 매칭해...


이 상상은 계속해서 써내려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 03화 출장 가면 비즈니스호텔 가서 자는 줄 알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